생리 시작하셨나요?
처음에는 내 귀를 의심했다. 살면서 저 문장을 누군가가 입밖에 내어 물어보는 장면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엔 나 같은 남자들도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지 않은가. 얼굴이 화끈거렸다.
누가 들을까 싶어 나는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아내 뒤로 조금 더 바싹 다가섰다. 인간 방음벽이 되어 간호사와 아내의 대화가 조금이라도 덜 퍼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생리 시작했냐고 대놓고 묻다니!
이 때는 바야흐로 2020년 초 우리가 처음 난임 병원을 찾았던 날이었다. 난임 병원에서 생리 시작일을 묻는 건, 일반 병원으로 따지면 "어디 아파서 오셨어요?"에 속하는, 기본 중의 기본 질문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다.(시험관 시술의 한 주기는 생리 2~3일 차에 시작된다) 내가 난임 병원에서 놀랐던 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병원이 오전 10시, 일러도 9시는 돼야 진료를 시작한다. 그런데 난임 병원은 오전 7시면 병원 문을 연다. 난임 환자 대부분이 K-직장인이기 때문이다. (앞선 글 '아내는 오늘도 퇴사를 고민한다' 참조)
머리부터 발끝까지 출근 준비를 완벽하게 마치고 병원에 7시까지 가려면 최소 새벽 5시 반에는 일어나야 한다. 올림픽대로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일출은 정말 장관이다. 목적지가 난임 병원이라는 게 슬프지만 말이다.
겨울에는 진료 마치고 돌아가다가 일출을 보기도 한다. (촬영시간 오전 7시 43분)
대기실 풍경도 인상적이다. 환자들 옷차림만 보면 병원이라기 보단 채용 면접장 같다. 다들 출근 복장이니 그럴 수밖에. 사람들은 진료실에서 주사실로, 주사실에서 원무과로, 마치 경보를 하듯 바쁘게 움직인다. 까딱하면 회사에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 긴박함이 구두 소리에 묻어난다.
여기서는 아무도 웃지 않는다
난임 병원의 또 하나의 특징은 참 조용하다는 거다. 어느 부부도 떠들지 않고, 심지어 웃지도 않는다.
거듭된 시험관 실패로 지옥을 헤매고 있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웃고 재잘거릴 기분이 아닌 게 당연하다. 하지만 난임 병원에는 지옥에 있는 사람만 오는 게 아니다. 천국을 거닐고 있는 부부도 많다. 누군가는 아기집을 보려고, 또 누군가는 아기 심장 소리를 들으려고 온다. 그럼에도 난임 병원에선 누구 하나 웃지 않는다. 왜일까.
난임 병원 안에서도 성공과 실패가 공존한다
지금 천국에 있는 그 사람이 불과 얼마 전까지 지옥에 있었기 때문이다. 지옥의 고통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지옥에 실제로 있어 본 사람이다. 그래서 그들은 천국의 기쁨을 남에게 철저히 숨긴다.
진료실에서 나오기 무섭게 아기 초음파 사진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접수대에서 나눠 준 산모수첩도 누가 보기 전 재빨리 가방에 집어넣는 식이다. 그런 모습을 옆에서 지켜볼 때마다, 이건 그냥 배려 차원이 아닌 일종의 연대라고 나는 느꼈다.
난임의 고통은 겪어본 사람만이 알기에..
아내의 버팀목 '동지방'
하지만 '난임인'들이 깔깔대며 떠드는 공간도 있다. 바로 동지 카톡방이다.(앞선 글 '우리 아가 안녕? 안녕..' 참조)
아내의 경우 A 난임 병원에 다닐 때 어떤 분의 초대로 들어가게 됐는데 병원을 옮긴 뒤에도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대화 참가자들은 서로의 얼굴도 이름도 모른다.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대화명은 나이와 시험관 차수로 이뤄져 있다. 예) 부런치/39/신선5차
"배 주사 맞기 전에 배에 공기가 많으면 덜 아프대요. 숨 크게 들이마시고 쏘세요~ㅎ"
사람들은 자신들이 체득한 시험관 시술 관련 노하우와 병원별 장단점, 건강 식단은 물론 심지어는 난임 병원 근처 맛집까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정보들을 공유했다. 하지만 아내가 동지방을 소중하게 여긴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위로였다.
때로는 스마트폰 속 활자가 더 큰 위로를 전하기도 한다
난임 생활이 시작되면 주변 사람들과 다소 소원해지기 마련이다. "애는?" "좋은 소식 없어?"라는, 남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쏘는 총에 고통받지 않으려는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다.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라 해도 '내쪽에서' 연락하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게 된다.(앞선 글 '그 질문 사양할게요' 참조)
아내는 톡방 속 난임 동지들의 위로를 통해 그 정서적인 빈자리를 채워갔던 것이다. 톡방의 동지들은 어쭙잖은 조언 대신, 진심 어린 공감으로 서로를 덥히고 있었다.
눈치 없이 임신 소식을 자랑하는 시누이
걱정하는 척 내 얘기를 떠벌리고 다니는 직장 동료
내 마음 몰라주는 바보 남편
..그 외 수많은 빌런들
이런 사람들에 대한 서운함을 저마다 꺼내놓고, 서운함을 느끼는 사람이 잘못이 아니라 그 감정을 느끼게 만든 사람이 잘못이라는 당연한 진리를 재확인하는 것이다.
주사기 사진에 담긴 의미
난임 동지들은 때때로 주사기 사진을 올리며 서로를 응원한다고 했다. 만약에(아주 만약에,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되겠지만, 아주 만약에) 마지막까지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할 만큼은 했다"는 자기 위안을 얻기 위해 미리 찍어두는 사진이다.
주삿바늘이 배를 찌를 때마다 느껴지는 통증, 쓰라림, 참담함은 사진에 담기지 않는다. 하지만 동지들은 느낄 수 있다.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다.
시험관 '한 차수'에만 이 정도 주사를 맞는다
아내는 동지방에서 정말 많은 위로를 받고 있다.(시험관 아기 카페들도 비슷한 역할을 한다) 내가 아내의 동지분들을 찾아뵐 기회가 있다면 우선 큰 절부터 올린 뒤, 이런 말씀을 꼭 전하고 싶다.
아내가 여러분과 대화할 때만큼은 활짝 웃었다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해줘서 너무 감사하다고 말이다.
<오늘도 아내를 바늘로 찔렀다(부제: 난임부부 생존기)> 첫 화부터 보기 https://brunch.co.kr/@a1f9702194b543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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