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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숨 Mar 10. 2022

나도 '임밍아웃'을 해봤다

아내의 두 번째 임신

손가락 5개의 의미


  2021년 가을의 어느 날. 나의 시선은 10분째 진료실 문을 향해 있었다. 확진자가 늘면서 남편들은 더 이상 아내와 함께 진료실에 들어갈 수 없었다. 난관 절 후 첫 이식을 앞두고 우리는 배아 상태를 확인하러 병원을 찾았다. 그 사이 채취를 두 번 더해 이제 시험관 6차다. 명실공히 고차수다.


  진료실에서 나온 아내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손가락 다섯 개를 폈다. 나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손가락 5개는 5일 배양 배아가 나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시험관 시술은 한마디로 체외수정이다.
정자와 난자를 따로따로 채취한 뒤, 수정된 배아를 여성의 몸에 다시 집어넣는 방식이다.
배아를 배양기에서 3일만 키워서 이식하면 '3일 배양 배아' 줄여서 '3일 배아', 5일을 키우면 '5일 배아'라고 부른다.
닷새를 죽지 않고 살아남아야 5일 배아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임신 성공 확률도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는 3일 배아5일 배아든 성공률 차이가 별로 없다는 연구도 나오고 있지만, 어쨌든 우리가 2년 가까이 시험관 시술을 하는 동안 5일 배아가 나온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실제로 이식한 건 3일 배아 2개였지만, 아내가 5일 배아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몸 상태가 됐다는 게 큰 수확이었다. 이렇듯 시험관 6차는 시작부터 느낌이 좋았다.


작년 가을 시험관 6차 때 이식했던 배아 친구들


이게 아기집이구나

 

  하도 실패를 많이 하다 보니 아내는 미리 임신 테스트를 하지 않는다. 어차피 실망할 게 뻔해서다. 피검사 날이 다 돼서야 테스트기를 꺼낸다.(앞선 글 '우리 아가 안녕? 안녕..' 참조)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피검사 당일 새벽에서야 테스트기를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고 있는데, 침실로 들어오는 아내의 표정이 밝다. 호떡이 때보다 훨씬 진한 두 줄이었다. 실제로 난관 절제 수술이 효과가 있었던 걸까? 아내는 화장대에서 어느 때보다 긴 기도를 올렸다. 1차 피검사 수치는 170. 정상 임신 기준인 100을 훌쩍 넘겼다.


  1주일 뒤 2차 피검사. 우리는 병원 가는 차 안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직전 유산의 트라우마가 있다 보니 더 조심스러웠다. 벌써부터 좋아했다간 이 기쁨을 누군가 다시 앗아갈까 봐 두려웠다.


  아내를 진료실에 들여보낸 뒤 5분쯤 지났을까. 아내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알 듯 모를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왔다. 아내는 대기실을 가로질러 걸어와 내 옆에 앉고 나서야 슬쩍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뺐다. 손에는 까만색 필름 같은 게 들려 있었다. 고개를 숙여서 봤더니 아기집 사진이었다.(초음파 사진을 드러내 놓고 보지 않는 것이 난임 병원의 불문율이다. 앞선 글 '그 병원은 누구도 웃지 않는다' 참조) 

  데스크에서는 간호사가 산모수첩을 슬며시 꺼내 줬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볼세라 얼른 수첩을 뒤집었다.


가운데 있는 작은 점이 아기집이다


  아기집 사진, 그리고 산모수첩. 마치 우리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현실감이 느껴지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 현실 같지 않은 일들을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2년 2개월의 임신 노력. 1년 8개월의 시험관 시술은 모두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다.


  누군가가 믿기지 않는다는 느낌이 뭐냐고 누가 물으면 날의 기억을 얘기해주겠노라고 다짐했다.



임밍아웃을 하다

 

  임신 확인서에는 출산 예정일까지 나와 있었다. 2022년 7월 8일이었다. 나는 얼른 핸드폰을 꺼내 우리 아기 예정일이라고 적었다. 아내는 회사 동료들에게 임밍아웃을 하기로 했다. 임신 5주 차, 살짝 이른 시기이긴 했지만, 아이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다.


  보건복지부 자료(2016~2020)에 따르면 해마다 9만 1600여 명이 유산을 한다. 임신 여성 4명 중 1명꼴이다. 그런데, 직장에 다니는 여성은 3명에 1명꼴로 아이를 잃는다. 유산율 직장에 다니지 않는 여성보다 7% 포인트 높다. 특히 주당 50시간 미만 일한 여성에 비해 61시간 이상 근무한 여성은 자연 유산 위험이 50~60% 더 높다는 연구결과도 있다.(출처: 한겨레 기사 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2556521)


  근로기준법 74조(임산부의 보호)에는 12주 이내 임신 초기 근로자가 하루 2시간 단축근무를 신청할 경우 반드시 허용해야 한다고 돼 있다. 아내도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동안 '약 껍질'을 회사에 안 버리고 집에 가져올 정도로(앞선 글 '아내는 오늘도 퇴사를 고민한다' 참조) 시험관 시술 사실을 꼭꼭 감춰왔기 때문에 회사에는 아내를 딩크족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임신 축하해!) 감사합니다!


  나도 엉겁결에 임밍아웃을 해버렸다. 선배들과의 저녁자리를 완곡히 거부하는 과정에서였다.


나) "제가 와이프 때문에 집에 좀 가봐야 해서요."

선배) "왜 임신이라도 했어?"

나) "(뜨끔) 아 그게.. 아직 아기집만 본 상태이긴 한데..."

선배) "그럼 빨리 집에 가야지~ 이럴 때 아내한테 잘 못하면 그거 평생 간다. 얼른 가~ 축하하고~"


  아내의 임신을 축하받는 일, 생각보다 훨씬 더 기분 좋은 일이었다.



'임산부 배지' 그리고...


  "어떤 젊은 여자분이 임산부 자리 났다고 나한테 알려줬어 감동 ㅠㅠ"


  아내는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받을 때마다 감동했다. 임산부 먼저라고 쓰여 있는 동그란 플라스틱 조각. 아내가 가장 갖고 싶어 했던 '임신템' 임산부 배지 덕분이다. 아내는 임신확인서를 받자마자 친구와 지하철역에 가서 배지를 받아왔다. 하지만, 계속 아쉬워했다. 줄 색깔이 핑크색이 아니라 빨간색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주말에 근처 다른 역으로 가보자고 했다. 역무실 문을 두드린 뒤 "아내가 임신을 했는데 임산부 배지를 좀 받을 수 있을까요?"라고 하자 역무원 한 분이 안쪽으로 가서 임산부 배지를 가져다주셨다. 이번엔 확실히 분홍색 끈이었다.


당시 지하철역에서 받은 임산부 배지


  "그거 들고 있어 봐 사진 찍어줄게"


  나는 역무실을 배경으로 임산부 배지를 들고 있는 아내를 사진에 담았다. 아내는 수줍은지 정면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 사진은 현재 세상 어느 곳에도 없다.


  왜냐하면..


  내가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사진을 지우던 날, 난  사진이 엄청난 복선을 담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찍을 때는 몰랐는데 다시 보니 사진 속 아내의 표정은 뭔가 불안해 보였고, 무채색 지하철역은 슬퍼 보였다. 


  아내는 새로운 배지를 받아온 그날 저녁 피 비침이 있다는 얘기를 했다. 그렇게 우리는 임신 6주 차에 접어들었다.





<오늘도 아내를 바늘로 찔렀다(부제: 난임부부 생존기)첫 화부터 보기 https://brunch.co.kr/@a1f9702194b543e/1

새 연재 <일상의 인상> 보기 https://brunch.co.kr/@a1f9702194b543e/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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