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한 주인공(박하선 분)이 산부인과에 갔는데, 거기서 우연히 만난 친구가 갑자기 '차분하게' 난임 사실을 털어놓는다. 이 대사를 듣자마자 서재에서 곧바로 거실로 뛰쳐나갔지만 이미 늦었다. 아내의 눈과 코는 벌써 빨개져있었다.
"저 배우가 시험관을 안 해봤나 봐. 해봤으면 (난임 사실을) 저렇게 담담하게 털어놓을 수 없다는 걸 알 텐데.."
아내는 원래 눈물이 많지만, 2020년 이후 특히 더 많아졌다. 건강한 난자를 만들겠다며 집 앞 공원을 그렇게 뛰었는데도 눈물은 전혀 줄어들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조깅을 하면 몸 안의 수분이 모두 빠져나가서 눈물이 안 난다"던 영화 '중경삼림' 속 하지무(금성무 분)의 말은 역시 거짓말이었다.
조깅하다가 찍은 사진. 꽃과 햇살.. 아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다 담겼다.
난임부부는 집을 나서면서 눈물을 장전한다. 어디든 아이들은 재잘거리고, 거리의 임신부는 생각보다 많다. 집안도 안전지대는 아니다. TV에서는 행복하게 태교를 하는 연예인 부부들, 재롱을 부리는 연예인 자녀들의 이야기가 시도 때도 없이 나온다.
난임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심리적으로는 물론이고, 인생 계획마저 크게 휘청일 수 있는, 끝없는 불확실성을 견뎌야 하는 장기전이다. 난임과 눈물이 불가분의 관계가 되는 이유다.
나는 그래서 우리 사회에 소박한 운동을 하나 제안할까 한다. 아예 눈물을 안 흘리게 할 수는 없겠지만, 사회 구성원이 모두 나서 난임 부부들의 눈물을 딱 한 방울만이라도 좀 줄여보자는 거다. 이름하여 '난임 눈물 한 방울 줄이기 운동'이다.
[운동 1] 함부로 묻지 않기
30대 이상 직장인들은 밥 먹으면서 아이 얘기를 생각보다 많이 하는 편이다. 아니, 정말로 굉장히 많이 한다.
당연히 난임부부에겐 피하고 싶은 주제다. 그러나 문제는 모든 난임부부가 '배우'는 아니라는 점이다. 접대용 웃음은 금방 바닥난다. 어느 순간 말수가 적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그냥 제발 넘어가 달라. 얘기에 동참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빤히 쳐다보며 "A씨는 애가 있다고 했나?"라고 묻지 말아 달라.
한 발 더 나아가 상대 쪽에서 먼저 아이 얘기를 꺼내기 전에는 제발 부탁이니 "애는요?"라고 묻지 말아 달라. 당신이 아이 얘기를 꺼냈는데, 이쪽에서 아이 얘기를 안 꺼내면 그냥 '난임이거나 딩크인가 보다'하고 넘어가 주시길 간곡하게 부탁드린다.
제발 "애는요"라고 묻지 마세요. 고통스럽습니다.
그리고 어쩌다 동료가 난임 부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셨다면 제발 아무 조언도 하지 말아 달라. 그냥 '얼른 아기가 찾아왔으면 좋겠네 기도할게'라고만 해달라. 우리는 팔도강산의 이름난 절은 다 돌아다니며, 심지어 108배도 아니고 120배를 했고, 삼신할머니 진지까지 차려드린 사람이다. 안 해 본 게 없으니 조언은 제발 넣어두시라.
[운동 2] 제대로 지원하기
시험관 시술 한 차수에만 최소 5차례 이상 병원에 가야 하는데 난임치료 휴가는 '한 달에 3일'도 아닌 '1년에 3일'이고, 엄격한 소득 기준 때문에 정부 난임 시술비를 지원받는 난임 부부는 전체의 20%도 안 된다. 이게 2022년 대한민국 난임 부부의 현실이다.
1년에 고작 3일 휴가를 받자고 회사에 자기 프라이버시를 공개하며 난밍아웃을 할 사람은 거의 없다. 유명 난임 병원에 아침 7시부터 사람이 바글바글한 이유다. 회사에 들키지 않고 시험관 시술을 하려면 출근 전에 병원에 가야 한다.
"출근을 일찍 하시네요?" "아뇨 난임 병원 갑니다"
최근 반가운 소식이 들리긴 한다. 난임치료 휴가를 연 3일에서 연 7일로 늘리고, 난임 시술비 소득 기준은 없애버리는 정책이 추진된다는 거다. 하지만 안심은 금물이다. 항상 예산은 부족하기 때문이다. 정부와 국회의 의지가 없다면 매년 추진만 하다가 끝날 수도 있다. 제발 난임 부부들이 '너무도 고통스러운' 시험관 시술 외에 다른 문제는 신경 쓰지 않도록 좀 지원해달라.
[운동 3] 난임에 관심 갖기
최근 오은영 박사가 상담을 하는 프로그램에서 배우 송재희·지소연 부부가 난임 사실을 고백해 화제가 됐었다.
그 전에도 연예인들의 난임 이야기가 나오긴 했지만, 관찰 예능의 일부로 다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두 사람은 진솔하게 난임 부부의 속마음을 털어놨다. 그리고 그 눈물에 많은 난임 부부와 그 가족들이 위로를 받았다.(우리 어머니는 이걸 보고 내게 울면서 전화까지 하셨다)
난임을 경험하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이렇게 날 것 그대로의, 난임의 고통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한다. 그래야 1, 2번 운동도 자연스럽게 효과가 있을 것 같아서다. 그러려면 미디어의 힘도 필요하다. 욕심이지만, 유퀴즈에서 난임에 대한 이야기를 한 번 다뤄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나와 아내는 진성 '자기님'이기도 하다) '자립청년'이나 '장례지도사' 등을 유퀴즈가 편견 속에서 건져 올린 것처럼, 난임에도 그런 기회가 찾아왔으면 한다.
연재를 마치며
'오늘도 아내를 바늘로 찔렀다(부제: 난임부부 생존기)'는 원래 12화로 계획했다. 그런데 집필하는 사이 회사 동료가 임신을 하면서 '그녀의 임신이 슬픈 이유' 편이 추가됐고, 생각보다 많은 관심에 이렇게 14번째 글, 에필로그까지 쓰게 됐다. 운 좋게도 '브린이(브런치+어린이)' 주제에 다음 메인 페이지에 글 세 편이 올라가기도 했다.
글 14편에는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우리 부부의 2년여 난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23만 쌍이나 되는 난임 부부에 대한 시각을 바꾸고 싶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1화). 평범했던 어느 날 난임 진단을 받고 환자가 된 우리 부부는(2화) 시험관 시술이라는 모래성 쌓기를 시작했고(3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여러 노력을 거듭했으며(4화), 그 과정에서 아내는 퇴사를 매일매일 퇴사를 고민하기도 했다(5화). 시험관 시술 기간 나는 매일같이 아내의 몸에 주사를 놓았고(6화), 어쩌다 찾아온 아가는 슬프게도 너무 빨리 우리를 떠났다(7화) 난임 동지들이 많은 힘이 줬지만(8화) 생각지도 않은 '난관수종' 수술에 우리는 또 한 번 좌절했고(9화), 이번엔 진짜 아가가 찾아왔다고 믿었는데(10화), 안타깝게도 두 번째 이별을 맞이해야 했다(11화). 지인의 임신 소식을 축하하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갈기갈기 찢겨버렸지만(12화), 우리 둘은 2022년에도 손을 꼭 잡고 '막차'를 기다려보기로 했다(13화). 이제는 사회에 작은 도움을 구한다.(14화)
우리를 힘들게 하는 건 이 우산으로 다 막아줄게
영화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이나 '드라이브 마이카(2021)'를 보면 극 중 주인공이 자신의 이야기가 담긴 연극을 관람하고, 때로는 직접 출연하며 상처를 치유한다. 자신의 상황을 타자화하고 객관화해서 '고통'과 '자신'을 분리해내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내게는 이번 집필이 그런 과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역시 난임은 힘들다. '생존'이라는 말이 계속 떠오를 만큼.
사랑이 유일한 진통제임을 알기에 오늘도 난 아내의 손을 꼭 잡는다.
그동안 '오늘도 아내를 바늘로 찔렀다(부제: 난임부부 생존기)'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