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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Mar 28. 2022

어느 날, 아빠의 전 연인이 찾아왔다.

'평범함'이라는 쉬운 단어가 왜 이리도 어려운지

 며칠 ,  12시가 넘은 늦은 시간에 아빠의 친구가 집에 오셨다. 아빠의  연인이었다. 미리 계획한  아니고, 급작스럽게 스케줄이 변경돼 놀러 오게 되었다고 한다.  번도   없는 아빠의  연인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당황했지만 주말 동안만 있다 가신다기에 '조금 불편해도 참지' 하는 심정으로 받아들였다.


 아빠가 연애하는 것을 제일 처음 알게  것은 대학생 때였다. 부모님이 이혼하시기   분은 별거를 했는데, 대학교 2-3학년 무렵, 아빠가 페이스북에서 사귄 외국인 여자 친구에게 보낼 메시지를 나에게 잘못 보낸 것이었다.  여자는 나보다도 어렸다. 아빠가 보낸 메시지는 'I love you too. Jagiya'였다. 나는 아빠에게 '이게 뭐야?'라고 물었고, 아빠는 '잘못 보냈어ㅋ'라고 담담하게 답장했다. 피가 거꾸로 솟았다. 어린 외국인 여자랑 연애하는  딸에게 들키고도 아무렇지 않은 아빠가 미웠다.  후로 아빠는    연애를 했고 그중 가장 최근에 만났던 사람이 오늘 우리 집에 놀러  것이다. 딸도 함께 있는 집에 무슨 생각으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침 일찍 출근해야 했기에 얼른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 안방에서 아침 일찍부터 꽃단장을 하던 아빠의  연인을 처음 보았다. 통통했던 우리 엄마와 달리 날씬하고 활기  분이었다. 그리고 무척 해맑고 애교가 많으셨다. 타들어 가는  속은 모른   사람은 아빠에게 애교를 부리고 아빠의 머리를 매만졌다. 어색하고 복잡 미묘한 감정이 들어 속이 메스꺼웠다. 엄마를 싫어하지만 엄마가 아닌 낯선 사람이 아빠에게 '자기야' 하고 애교를 부리는 것이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주말만 있다 간다던  사람은 주말이 지나도 가지 않았고, 나도    써본  앞치마를 메고 요리 솜씨를 뽐내며(사실 음식도 그다지 맛있지 않았다.)   곳곳을 누볐다. 냉장고 , 찬장   주방 살림의 위치를 자기 편하게 바꿔 놓고 거실도 차지하였다.  영역을 침범당했다는 사실과 주방 살림을 제멋대로 바꿔 놓은 것이 화가 났지만 '내일이면 가시겠지' 하는 생각으로 참았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사람이 우리 집에   나흘이 되던 ,  분이 여행  틈을  아빠에게 불편한 마음을 담은 편지를 썼다. 말로 직접 전하는 것보단 글로 쓰는 것이  나을 거라는 마음에서였다. A4용지를 빼곡히 채운 진심이었지만 좀처럼 아빠에게 보여  용기가 나지 않았다. 편지를 고이 접어 다시  책상 구석에  버렸다. 그리고 엉엉 울었다. 당시엔 이유를 모른  당황스럽고 찝찝했던 감정을 찬찬히 마주해 보니,  기괴한 상황에서  의사는 존중받지 못했다는 것과  영역에서 밀려날  있다는 묘한 불안감과 공포감이 컸던  같다. 그리고  사람은 이곳에서 무려 6일을 머물다 갔다.


 연이은 아빠와의 갈등, 엄마와의 갈등  찾아온 간만의 평화였는데, 나에게 또다시 찾아온 고통스럽고 혼란스러운 시간이었다. 아빠와 엄마는 아무렇지 않은데 나만 벌써  번째 타격이다. 6 만에 만난 엄마는 쓰레기 집에 살고 아빠는  연인을 우리 집에 데려오다니!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연인 혹은 배우자로 적합한 이성' 관한 글에는 빠지지 않고 '가정이 화목한 사람'이라는 항목이 있다. '사랑 받아본 사람이   안다' 논리였다. 나는  항목을 읽을 때마다 '사람마다 른 거, 이런  어떻게 단정 짓냐'는 생각을 하고 애써 넘겼지만 마음이 아팠다. 부모님이 서롤 사랑하지 않아도, 온전한 가정이 아닐 지라도,  못 할 가정사가 있더라도  사람의 곧은 신념과 노력만 있다면 상대방을 충분히 사랑해 주고 편안하게 해 줄  있다고, 좋은 아내가, 좋은 엄마가   있다고  생각했다.


 문득 나의 주장은 가정사가 '과거형' , 이미 매듭지어진  때만 해당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처럼 끝도 없이 가정사가 지속되는 사람은  삶이 바람   없어 이리저리 치이다 보니 상대방이 원하는 사랑을 충분히    없을  있겠다는 생각에 서글퍼졌다. 예전에 사귀던 남자 친구에게 이별을 고했을 , 그가 눈물 맺힌 원망 섞인 눈으로  바라보며 '화분도 물을 주고 사랑을 줘야  자라는 거야.'라고 했던 것이 생각났다. 당시에는 연인에게 버림받은 지질한 루저의 남 탓이라고 생각하고  귀로 흘려버렸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삶만으로도 벅차서 상대방이 원하는 만큼 관심을 가져다줄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개인적이고 독립적인 성향은 바람   없는 가정환경에서  것을 챙겨야만 했던 작고 어린아이의 몸부림으로부터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학원을 운영하거나 유치원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종종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을 한다.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달리 유별나길래 봤더니 부모님도 똑같았다는 것이다. 부모님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를 아이가 보고 자라기 때문에 아이의 성격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   없는 부모님 밑에서  최선을 다해 친구들, 선생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평범하지 않은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 임을 티 내지 않고 살았다. 나는 환경을 바꿀  없었기에, 환경에 물들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 가끔 너무나 속상할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휴대폰을 붙잡고 엉엉 울기도 했다. 친구는 내게,  인생은  이렇게 평범하지 않냐고 했다. 그럼 나는 '그러게, 나에게 평범함이라는 쉬운 단어가  이렇게  평범한 거냐.' 라며 쓸하게 웃으며 대답하곤 했다.


 나는 이십 대에  연애를 많이 했다. 그렇지만 모든 남자 친구에게  평범하지 않은 가정사를 말하진 않았다.  가정사를 얘기하면 밝고 긍정적이고 똑 부러져 보이던 내가 어둡고 나약한 사람으로 보일 까 봐,  짐까지 짊어지게 하려는  아닌지 부담스러워할 까 봐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냥 부모님이 따로 지내는 정도만 은연중에 드러내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   힘든 얘길  ?'라는 얘길 듣기도 했다. 내가 얼마나 힘든 지를 얘기하면 너무 부담스러워할 까 봐 그런 건데 내심 서운해  남자 친구도 있었다. 삼십 대가 되어 결혼을 생각하는 나이가 되고는 더더욱 새로운 만남이 두려워진다. '이런 나를 반겨줄 가족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애초에 여지를 닫아 버린다.


  '사랑은 바보들의 전유물'이라는 어느   문구가 생각난다. 어쩌면 사랑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저마다 사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숨지 않고 기꺼이 '바보가  용기' 가진 사람들이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6년째 키우고 있는 고양이가 '-' 하며  다리에  머리를 빈다. 부족한 나를 아낌없이 사랑해 주는 사랑스럽고 고마운 존재이다. 평범함이라는 단어가  어려운 나의 삶에 들어와 '평범한 가족' 되어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어느새 나도 평범함에 녹아든 느낌이 들어 잠을 청한다. 자고 일어났을 때도  평범하고 안전한 느낌이 계속되기를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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