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9코스의 경로가 지난해(2021년) 10월부터 새롭게 바뀌었다. 난드르라는 정겨운 이름의 대평포구에서 시작하여 말이 다니던 몰질을 지나 박수기정을 오르는 들머리는 옛 코스와 같다. 중간은 완전히 달라졌다. 탁 트인 조망이 좋은 군산과 천연기념물인 상록수림이 우거진 깊은 안덕계곡이 포인트를 주는 코스다. 마지막은 예전과 같은 화순 금모래해수욕장에서 마친다.
시작점인 대평포구 가는 교통편이 마땅찮다. 안덕삼거리의 안덕계곡 정류장에서 택시를 부른다.
난드르, 올레9길 시작점
난드르의 박수기정에서 시작한다.
대평리(大坪里)의 옛 이름은 '난드르'이다. '평평하게 길게 뻗은 드르(들)'를 뜻하는 제주어인데 한자로 표기하여 대평이다.
자그마한 대평포구를 병풍처럼 둘러싼 박수기정은 대평리의 랜드마크다. '박수기정'은 박수(바가지로 마실 샘물)와 기정(솟은 절벽)의 합성어로 '바가지로 떠서 마실 수 있는 깨끗한 샘물이 솟아나는 절벽'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박수기정
박수기정을 오르는 들머리부터 돌무더기가 울퉁불퉁 튀어나와 걷기 불편하다. 상록관목이 하늘을 가린 좁은 길의 숲향기가 코끝을 자극하여 기분이 상쾌하다. 오르막이 계속되어 제법 숨이 찬다. 15분 정도면 올라가니 걸을만하다.
말길을 따라 박수기정을 오른다.
이 길을 몰질(말길)이라 한다. 말이 다니던 길이다. 고려 때, 제주 서부 중산간 지역에서 키운 말을 원나라로 싣고 가기 위해 송항인 대평포구로 가는 공마로가 몰질이다. 800여 년 전에 난 길이다. 잠시 쉬면서 건너편을 돌아본다. 상록 관목이 우거진 앞막은골. 골짜기 너머 군산오름이 보인다.
말길을 오르며 본 상록 관목이 우거진 앞막은골. 골짜기 너머 군산오름이 보인다.
박수기정 위에 올라서면 넓은 채소밭이 펼쳐지고 밭 사이의 한밭소낭길이 다소곳하다.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여기부터 올레 리본은 다른 길을 안내한다. 2019년 가을에 왔을 때에는 절벽 가장자리를 돌면서 대평마을과 해안을 내려다보며 걷는 재미가 있었는데, 아예 바다가 보이는 곳은 지나가지 않는다.
한밭 소낭길
태흥사 삼거리에서 월라봉 옆으로 산방산과 용머리해안이 살짝 그 모습을 드러낸다. 차가 다닐 수 있는 농로를 따라 중산간 넓은 경작지가 이어진다.
태흥사 삼거리에서 월라봉 옆으로 본 산방산과 용머리해안
들에 그냥 자란 것인지 재배하는 것인지 개여귀가 무성하게 자라 꽃을 피우고 있다. 넓은 메밀밭에 하얀 메밀꽃이 피어 바람에 물결처럼 일렁인다.
넓은 메밀밭의 흰꽃이 바람에 일렁인다.
농로는 안덕면 감산리를 관통하여 월라봉 산허리를 감아 돌며 우회한다.
군산이 가까이 다가오고, 멀리 범섬과 문섬, 섶섬이 서귀포 앞바다에 떠 있다. 강정항과 새연교가 도드라져 보이다. 파인애플과 비파가 심긴 농장이 펜션과 함께 나타난다.
멀리 범섬과 문섬, 섶섬이 서귀포 앞 바다에 떠 있고, 강정항과 새연교가 도들라져 보이다.
파인애플과 비파가 심겨진 농장 뒤로 군산이 가까이 다가온다.
띄엄띄엄 있는 농가를 지나간다. 주황색으로 익어가는 비파가 돌담 너머로 내다보고 있고, 분홍찔레는 담장을 덮고 있다. 감사 기도를 올리는 듯 고개를 숙인 섬초롱꽃이 돌담과 조화를 이룬다.
감산리 중산간 마을. 좌측부터 비파, 분홍찔레, 섬초롱꽃
조망의 명소, 군산을 오르다.
한밭입구에서 대평감산로를 만난다. 대평감산로는 안덕계곡 삼거리에 대평포구로 이어지는 도로로 택시를 타고 지나갔던 길이다.길을 건너 창전리로 들어서서 군산으로 향한다.
군산으로 가는 길목에 약천암이 있다. 돌로 쌓은 축대 위의 절 마당에 연등이 매달려 있다. 축대 돌더미 사이사이에 다육식물이 심겨 있다.
약천암
박수기정에서 걷기 시작하여 군산을 넘어 안덕계곡 가기까지 화장실이 없다. 물론 가게나 음식점도 없다. 용변을 볼만한 곳은 지나온 태흥사와 이곳 약천암 두 곳뿐이다. 약천암이 올레꾼 때문에 몸살을 앓는 모양이다. '수양 중인 암자이므로 일반인 출입금지'라는 올레 안내판이 서 있다.
약천암 옆을 지나다가 돌아본 메밀밭과 산방산 전경
본격적으로 군산의 숲 속으로 들어선다. 상록성 교목들이 하늘을 가리고, 고사리와 유사한 개고사리와 큰천남성 등의 여러해살이풀이 지피를 덮고 있다. 한적한 오솔길이 이어진다.
큰천남성. 가을에 열매가 빨갛게 달린다. 꽃말은 '보호, 비밀, 여인의 복수'이다.
개고사리는 산지 습지나 응달에서 자라는 상록성 여러해살이풀이다. 꽃말은 '엄마의 사랑'이다.
올레는 임도를 만나 숲을 벗어난다. 임도 끝에 간이 주차장이 있다. 전망이 좋아 형제섬과 송악산, 뒤로 가파도가 그림 같은 모습으로 눈에 들어온다.
군산 간이 주차장에서 본 사계 앞바다. 형제섬, 송악산, 가파도가 눈에 들어온다.
구릿대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에 일제가 파놓은 진지동굴이 군데군데 산재해 있다.
입구는 좁아 보이지만 안은 넓고 길다. 길이가 180m, 높이가 1.2~1.7m나 된단다. 관측소, 대피소등으로 활용되었던 일본군의 동굴이다. 가슴 아픈 역사의 상처가 남아 있는 근대 전쟁 문화유산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란 꽃말을 가진 구릿대(좌), 일제 동굴진지(우)
정상 앞에 긴 간세 벤치가 마련되어 있다. 올레9코스의 중간 기착지이다. 스탬프도 찍고 앉아서 땀을 식힌다. 군산은 제주의 오름 중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빼어난 조망이 펼쳐지는 명소라 찾는 사람이 많다.
올레9코스 중간 기착지. 벤치형 간세가 있다.
군산 정상에 서면 먼저 발아래의 안덕면이 보인다. 난드르 마을의 비닐하우스와 밭과 밭 사이의 경계를 이루는 숲이 조각천을 이어 만든 조각보처럼 아름답게 보인다.
먼발치로 보이는 난드르 마을
군산은 해발 334.5m, 비고 280m인 원추형 기생화산이다. 오름의 생김이 군막사처럼 생겼다 하여 군산오름이라 한다. 산방산과 함께 높이도 1,2위를 다투고, 특이한 모습이 도드라져 서귀포시의 대표적인 오름이다. 뒤로 한라산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정상에서 본 한라산
군산은 사방으로 훤하게 트인 전망을 오래 감상하지 못하는 흠이 있다. 바위로 된 정상의 터가 좁아 사진 몇 장 찍고 빨리 자리를 비켜 준다. 다음 사람을 위해.
군산은 제주의 368개 오름 중 가장 젊은 오름이다. 고려 목종 10년(1007년)에 화산이 폭발하여 생겼으니 올해 1015세에 불과하다.
정상에서 본 박수기정과 월라봉 일대
군산전망대에서 사방의 숱한 오름과 섬들을 모두 볼 수 있다. 조금 전 지나 온 박수기정과 월라봉은 원형 경기장 모습을 하고 있다. 월라봉은 남쪽으로 깎아지른 해안절벽을 안고 있고, 북서쪽으로 안덕계곡의 창고천이 흐른다.
또 그 너머는 화순항 남쪽 바다의 모습이다. 왼쪽부터 마라도, 가파도, 형제섬, 송악산, 용머리, 산방산의 모습이 줄지어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