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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안 Sep 26. 2023

#17 알약

소설 연재


재인은 사무실에서 행정 업무를 보고 있다. 잠시 뒤 상주로 보이는 남성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녀는 곧바로 일어서서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혹시 몇 호실이세요?”


남성은 대답한다.

“106호실입니다.”


재인은 안쪽 데스크로 자리를 안내한다.

“여기로 앉으시겠어요. 제가 서류 조금 챙겨서 돌아와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잠시만요.”


재인은 옆쪽 프린트기에서 서류 몇 장을 출력해서 자리로 돌아온다. 서류를 남성 쪽으로 펼치고 펜을 들고 설명하기 시작한다.


“여기 보시면 크게 장례식장 이용료, 상조 비용 그리고 장지 관련 비용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우선, 106호실에서 3일장 진행하셔서 기본 비용 외에 추가되는 빈소료는 없습니다. 장례지도사와 도우미 비용은 여기, 제단 보조 및 헌화 비용은 그 아래에 표시해 두었습니다. 음식 비용 외에 술이나 음료는 별도로 기재해 두었습니다. 상복은 남녀 각 3벌 지원해 드렸습니다. 다음 장으로 넘기시면 리무진과 버스 등 차량 운행 비용과 유골함 비용 기재해 두었습니다. 그래서… 총비용은 1,258만 원입니다. 여기 직접 보시고 확인해 주세요.”


남성은 서류를 간단히 살펴본 후 의자 옆에 있는 종이가방을 연다. 부의금으로 들어온 현금 뭉치가 보인다. 남성은 몇 뭉치를 꺼내 재인에게 전해주며 확인해봐 달라고 한다. 재인은 바로 옆에 놓인 계수기에 현금 다발을 넣는다. 촤라라락. 촤라라라락. 그리고 남은 현금은 다시 가다듬어 남성에게 건넨다.


“네, 1,258만 원 받았습니다. 남은 금액은 다시 돌려드렸습니다.”


남성은 재인이 건네준 돈을 받아서 종이가방에 담고 일어선다. 그리고는 간단히 인사하고 사무실을 나간다. 재인도 일어서서 고개 숙여 인사한다. 사무실 문이 닫힌 후 그녀는 정산한 금액을 한번 확인하고 종이끈으로 묶어 보관함에 넣어둔다.



***



띠링.


그 시각 한 중년 여성이 동네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다. 53세 이정숙이다. 정숙의 휴대폰에 알림이 울린다. 재인이 미리 예약해 두었던 이메일이 발송된 모양이다. 정숙은 내용을 확인한 후 아무 내색 없이 다시 휴대폰을 바구니에 집어넣고 마저 장을 본다.


집으로 돌아온 정숙은 다시 휴대폰을 꺼내 들고 이메일 내용을 찬찬히 확인한다.


“당신은 3일 뒤 2022년 7월 15일 죽습니다. 지금부터 당신이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죽는 날짜는 바꿀 수 없습니다. 이제 남은 3일 동안 죽음을 준비하세요.’


정숙은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주방 서랍에서 약 통 하나와 가정용 절구를 꺼낸다. 절구통 위에 비닐봉지를 여러 겹 끼워 넣고 약통의 하얀 알약 전체를 절구 속에 쏟아붓는다. 절구 방망이도 비닐랩으로 여러 겹 감는다. 화장실에서 두꺼운 수건을 가져와 절구통 아래에 놓고 조용히 약을 빻아 가루로 만들기 시작한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그녀는 가루가 된 약을 모아 흰색 종이에 붓는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꺼내 뚜껑을 딴다. 약이 든 종이를 오므려 병 안으로 가루를 모두 집어넣고 뚜껑을 닫는다. 병을 몇 번 흔든 후에 곧바로 냉장고 깊숙한 곳에 보관한다.


절구통과 절구 방망이에 감싸놓았던 비닐은 잘 뜯어낸다. 그리고 약을 담았던 종이와 함께 손으로 뭉친 후 검은색 비닐봉지에 넣고 단단히 묶어서 가방에 쑤셔 넣는다. 마지막으로 절구통과 절구방망이는 깨끗하게 설거지한다. 그 후 수건으로 꼼꼼히 닦 원래 있었던 주방 안쪽 구석 서랍에 넣어 놓는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저녁 8시쯤 딸 윤하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다.


“엄마, 다녀왔습니다.”

“오늘은 조금 늦게 퇴근했네. 고생 많았어.”

“아니에요. 엄마 저녁은요?”

“엄마는 생각이 없네. 윤하 너 밥 차려줄 테니까 어서 와서 저녁 먹어.”

“저도 간단히 먹고 들어왔어요. 피곤해서 바로 들어가서 쉴게요.”


윤하는 방문을 닫고 들어간다. 조금 뒤 술에 취한 남편이 비틀거리며 들어온다. 아무 말 없이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들고 거실로 가서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정숙은 주방 식탁에 조용히 앉는다. 남편은 술 한 병을 금방 해치우고 주방 쪽을 향해 소리 지른다.


“술 한 병 더 가져와, 빨리!”


정숙은 아무 말 없이 냉장고에서 술 한 병을 가져다준다. 남편은 안주도 없이 술을 계속 마신다. 또 시간이 흐르고, 아내에게 술을 더 가져오라며 소리를 지른다. 하지만 남편은 이제 눈이 흐릿하게 반쯤 감긴 채 몸이 갸우뚱한 모습이다.


정숙은 남편의 상태를 슬쩍 확인하고 냉장고 문을 연다. 그리고 이번에는 낮에 안 쪽 깊숙이 넣어놓았던 술병을 꺼낸다. 이미 따진 뚜껑을 다시 따는 척하며 가져다준다. 인사불성이 된 남편은 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정숙이 가져다준 술병을 빼앗듯 가로채서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한다. 그녀는 다시 식탁으로 돌아와 앉아서 남편을 지켜본다. 마지막 한 모금까지 다 마신 남편은 이내 쓰러져 잠에 빠져든다. 정숙은 조용히 거실 불을 끈다.


다음날 아침 방에서 출근 준비를 마친 윤하가 나온다. 정숙은 윤하에게 조용히 손짓하며 문 쪽을 가리킨다. 윤하는 말없이 현관문을 나오고 정숙도 따라나선다.


“왜, 엄마?”

“응, 아니야. 어제도 아빠가 술 많이 드시고 주무셔서 아마 늦게 일어나실 거야… 그냥 조용히 나오라는 뜻이었어. 저 사람 일찍 일어나느니 그냥 늦게 깨는 게 나도 편해서…”

“아… 엄마 근데 어디 아파? 안색이 안 좋은 거 같은데…”

“아니야. 윤하야, 너 오늘 몇 시 퇴근이야? 엄마가 너 데리러 갈게.”

“갑자기?”

“그냥 엄마도 좀 갑갑해서. 어차피 오늘 금요일이니까… 너 퇴근하고 나면 엄마랑 둘이서 이모 집에 같이 다녀오자.”



***



그날 저녁 정숙은 윤하와 언니집에서 저녁을 먹은 후 방 안에 같이 누워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연다.


“윤하야… 너 벌써 29살이지. 언제 이렇게 다 컸어.”

“새삼스럽게 무슨.”

“윤하야, 잘 커줘서 고마워. 엄마가 그동안 널 지켜줬어야 했는데… 엄마는 엄마 자신도 못 지키는 사람이었어서 그동안 윤하 너까지 힘들게 했어…”

“왜 그래 엄마, 무슨 일 있어요?”

“무슨 일 있기는… 윤하야,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고 앞으로는 아빠 때문에 괴로워하지도 말고 엄마 때문에 발목 잡히지도 말고… 너는 너 인생을 살아. 그게 엄마 소원이야.”

“갑자기 왜 그래, 엄마 어디 가?”

“아니… 어디 가긴 무슨. 그리고 엄마가 많이 사랑해. 오늘은 엄마도 그냥 답답해서 너랑 편하게 이야기하고 잠도 푹 자려고 이모 집에 오자고 했어… 엄마는 잠깐 나가서 이모랑도 이야기 조금 하다가 잘 테니까…  윤하 너는 먼저 자.”


정숙은 작은 방에서 나와 언니가 있는 안방으로 들어간다.


“어, 들어와.”

“언니, 들어가도 돼 잠깐?”

“그래, 들어와. 여기 같이 좀 눕자.”


정숙은 언니 옆으로 가서 나란히 눕는다.


“언니… 나중에 말이야… 언젠가 윤하한테 언니가 필요한 날이 올 거야… 그때… 우리 윤하 좀 부탁해…”

“너, 무슨 일 있어? 정서방이 아직도 정신 못 차렸니?”

“그 사람이야 늘 그렇지 뭐. 아무튼 우리 윤하 그동안 고생 많이 했잖아. 이제는 더 이상 부모 때문에 힘들게 안 하고 싶고, 이런 환경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싶어… 언니 그러니까… 더 묻지 말고… 그냥 나중에 우리 윤하가 필요로 할 때… 그때 언니가 조금만 도와줘…”

“그래, 그건 당연한 소리지. 윤하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잘 살아갈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마.”


이틀 뒤 일요일 아침, 정숙은 윤하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미동도 없이 거실에 누워있는 남편이 보인다.


윤하가 속삭이며 정숙에게 말한다.

“설마, 아빠 아직까지 자는 거야?”


정숙은 남편 쪽으로 가서 흔들어 깨워본다.

“일어나 봐요.”


그러자 남편의 팔이 힘 없이 바닥으로 툭 떨어진다. 정숙은 119에 전화를 걸어 신고한다. 곧바로 구급차가 집으로 와서 구조대원들이 남편을 들것에 싣는다. 정숙은 윤하에게 집에서 기다리라고 하며 혼자 보호자로 따라나선다. 구급차는 사이렌 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병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큰 충격음이 들린다.


쾅!


반대쪽에서 달려오던 회색 승용차가 구급차를 세게 들이받은 것이다.



***



다음날 아침 뉴스에서 앵커목소리가 흘러나온다.


“7월 15일 어제 오후 음주차량이 구급차를 들이받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사고 소식을 김준현 기자가 정리했습니다.”


“네, 김준현 기자입니다. 어제 오후 너울시의 한 교차로입니다. 도로 왼쪽에서 구급차 1대가 긴급 사이렌을 울리며 지나가는데 회색 승용차 1대가 빠르게 달려와서 구급차 오른편을 순식간에 들이받았습니다. 구급차는 이미 의식이 없는 50대 환자를 이송 중이었는데요, 이 사고로 환자의 아내도 오늘 아침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구급대원과 승용차 운전자를 포함한 3명도 다쳤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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