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매해 6월 셋째 주일이 아버지날입니다. 장미가 피고, 라벤더 향기가 무르익을 이즈음에는 40여 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더 그립습니다. 꽃을 좋아하셨으니 저희 정원에서 흐드러지게 핀 장미를 보셨다면, 분명 와인 한잔하자며, 함박웃음을 지으셨을 겁니다.
49세의 짧은 인생, 남은 가족에게 행복한 기억만 남기고 홀연히 떠나셨습니다. 어쩌면 오래전이라 서운한 감정은 사라졌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럼에도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아버지'라고 했을 거예요.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이상적으로 가꾸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셨단 생각이 듭니다. 그게 더 감사하고, 마음이 아픕니다.
아버지는 경제학을 전공한 교수 지망생이었는데, 가업을 물러 받으라는 조부모님의 간절한 부탁으로 결혼 후, 작은 약국을 온 가족이 함께 운영하셨습니다. 대형 도매약국으로 성장하자, 그 공을 지역 주민에게 돌리고, 가난한 약대생과 의대생을 위한 장학재단도 만드셨어요. 이윤의 일부를 사회 환원한다고 약국 이름을 딴 장학사업에 많은 공을 들이셨습니다.
저희 삼남매가 한참 공부할 나이가 되자, 과감히 약국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가서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작은 제약회사를 경영했습니다. 아버지의 일생을 한 편의 글로 쓰기엔 아주 외람되지만, 이렇게라도 정리해 보고 싶었습니다. 이제라도 조금 철든 딸이 '고마움과 사랑'을 전한다면, 아버지도 어디선가 흐뭇한 미소로 보고 계실 거 같습니다.
아버지는 성실하고, 반듯한 삶을 사셨습니다.
오죽하면 동네 분들이 아버지가 퇴근하는 모습에서 오후 6시란 것을 알 수 있다고 했으니까요. 회사가 있는 봉천동에서 서교동 집에 도착하실 땐 의례 그날 저녁에 먹을 생선 담은 봉지를 들고 오셨습니다. 집에 오는 길에 노량진 수산시장을 들르기 때문인데요. 엄마는 부지런히 생선을 손질해 맛있는 매운탕을 끓여 동그란 식탁에 온 가족이 앉아 식사했습니다. 사이좋은 삼 남매의 하루를 들으며 흐뭇해하던 미소가 아직도 또렷합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아버지는 엄마와 동네 산책을 하셨습니다. 두 분은 이 시간에 주로 자식 이야기를 많이 나누신 거 같아요. 자식 셋의 전공도 이미 초등학교 들어갈 때부터 정해 놓았는데, 그대로 진학했으니, 아버지의 통찰력이 대단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산책이 끝나면 집에 들어와서 책을 읽으셨는데요. 이와 같은 생활을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 꾸준히 하셨으니 루틴 좋아하는 저는 아버지를 쏙 빼닮은 거 같기도 합니다.
늘 생산적인 대화와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시고, 책에서 얻은 지혜를 실천하셨습니다.
경제에 대해, 평소에도 가정교사처럼 잘 알려 준 덕에, 갑자기 돌아가셨어도 엄마가 무리 없이 아버지 사업을 이어서 하셨어요. 우리에게뿐만 아니라, 가까운 친척들이 모여도 현실 경제에 대한 조언을 아낌없이 나누셨습니다. "돈이 조금이라도 모이면, 은행에 가만히 두지 말고, 공부해서 늘릴 생각을 해라! 그래야 그게 재산이 된다."라는 말도 수없이 하셨어요. 저 포함, 많은 친척이 아버지의 조언을 따랐는데요. 선견지명이 있는 충고였습니다.
집에 TV가 있었어도, 가족이 함께 본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아이들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부모가 TV를 보면 되겠냐고 절대 틀지 않으셨거든요. 그 대신 아버지의 손에는 늘 책이 있었습니다. "책 읽기가 성공의 밑거름이 된다"는 것을 어릴 적부터 몸에 익히도록 모범을 보이셨어요. 그런 습관 덕에 두 남동생이 책을 좋아하고, 영특했는지도 모르겠어요. 각자 자기 분야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최연소 대학교수로, 유능한 변호사가 됐으니까요.
생각이 시대를 앞서가고, 세심한 것까지 자상하게 챙기시는 멋쟁이였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대학에 들어가자, 제일 먼저 데리고 간 곳이 남산에 있는 체육관인데요. 1970-80년대만 해도 취미로 운동하는 곳이 거의 없었는데, 이런 문화를 미리 익혀야 한다고 하셨어요. 요즈음 운동 열풍을 보면서 얼마나 앞서고 멋진 생각을 했는지 다시 한번 느낍니다.
그 다음엔 신라호텔, 롯데호텔 등 크고 좋은 호텔과 미술관을 데리고 다니며 안목을 높이도록 도와주셨습니다. 맛있는 것을 사주고, 다양한 말씀을 해 주셨는데, "대학에서 끝나는 공부가 아닌, 평생 사용할 수 있는 산 공부 습관을 지녀라. 옷보다 가방과 구두를 좋은 것으로 신고 다녀라." 등등 아주 세세한 것까지 말씀하셨어요. 미국에 와서 용감하게 비즈니스를 한 것도 "산 공부를 해라!"는 평소의 가르침 덕이었단 생각이 듭니다.
나태주의 『행복 수업』에서 "좋은 기억은 인생이라는 엔진을 돌리는 최고급 기름이다"란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와의 추억이 그랬습니다. 힘들 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나 저를 기운 차리게 했으니까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일과 가정을 조화롭게 가꾼, 문학과 예술을 사랑한 멋쟁이이고, 로멘티스트였습니다. 지금의 저와 제 가정이 굳건하게 서 있는 것도 평소 말씀하신 "가정을 잘 가꾸고, 안목 있고 멋지게 잘 살아라!"란 말씀 덕이라 여겨집니다.
친애하는 아버지!
그곳에서는 편안하신가요? 마지막 가시는 날은 참 더웠는데, 날씨는 괜찮나요? 아버지의 바람대로, 우아하고 멋지게 살다 갈게요. 잘 지내시다 다시 만나요. 고맙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