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험 기간 동안 나의 유일한 대화 상대는 부모님을 제외하곤 도서관 매점 아주머니뿐이었다. 사회성은 이미 퇴화했고 잦은 입병, 코피, 스트레스성 위장장애 등을 겪으며 몸은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었다. 세상과 단절된 채 오로지 합격만을 목표로 달려왔지만, 공무원 시험을 포기하고 남은 결과는불안정한 정신과 나약해진 육체 상태. 그리고 2년의 공백기.
수험생활이라는 기간은 결과에 따라 붙여지는 이름이 달라졌다. 합격생에게 수험 기간은 '합격을 위해 노력한 과정'으로 여겨지지만, 불합격생인 나는 단지 공백기라는 무거운 짐을 떠안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해 여름, 인생에서 가장 비참한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누가 지나가다가 툭 건드리기라도 하면 내 멘탈은 와르르 무너질 정도로 약해져 있었다. 나에겐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다. 밖으로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사회에서 낙오자로 낙인찍힌 느낌마저 들었다. 내 인생이 너무 답답했고 어디서부터 바로 잡아야 할지 감도 안 왔다. 의욕도 없고 무기력한 채 방에서 멍하게만 지내는 날이 늘어갔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
사회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절망스러웠다. 이렇게만 지낼 수는 없어서 기분 전환을 하려고 ‘여행이라도 다녀올까?’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아무 결과가 없는 나에겐 사치라 여겼다.잠시 쉬어가겠다는 생각 자체는 나를 더 뒤처지게 만든다고 믿었다. 부모님을 떠올리면 더욱이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내 인생을 위해 투자한 2년이었지만, 그 기간 동안 수험생인 나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신 부모님에겐 정말 면목이 없었다. 나를 믿어주셨는데 그걸 결과로 보여드리지 못한 딸이 되었다. 풀이 팍 죽어있는 내게 부모님은 본인들 신경 쓰지 말고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라고 하셨지만 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제대로 쉬지도 그렇다고 뭐를 하지도 못하고, 마음만 조급했던 나는 결국 딜레마에 빠졌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 당장 무엇인가를 시작하지 않으면 영영 뒤처질 것 같은 느낌으로 하루하루 흘러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불안함은 커지기 시작했고 일단 뭐라도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곧 스쳐 지나갔다. 문제는 무언가를 새롭게 시도하는 것이 두려워졌다는 것.
공시생의 신분에서 취준생의 신분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아무도 만날 자신이 없었다. 수험 시작 때부터 비활성화해 둔 SNS 계정은 다시 시작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나보다는 잘 지내고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 비참한 현실을 굳이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2년의 공백기로 인해 나만 정지한 기분이 들었고, 나 빼고 세상의 모든 게 잘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내 주위 또래들은 한창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고 빠르면 대리를 달았을 나이에 나는 백수, 아니 자존감이 바닥치는 백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