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에게
무탈히 2월을 맞이했니? 암스테르담은 자정을 넘어섰어.
한국은 날이 조금은 풀렸다고 들었어. 남반구는 아마 여름이겠지. 이곳은 아주 변덕스러워. 바람이 불고, 비가 종잡을 수 없이 내리다 멎고, 금세 해가 쬐고... 쌀쌀하고 흐리지만 그게 싫지만은 않다. 갑자기 바람이 세져서 창문을 흔드는 소리가 들리는 지금이지만 말이야.
날씨, 하니 떠오르는 게 있어. 삶의 리듬에 관한 이야기야.
이번 주 내내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면 네가 떠나 온 나라의 날씨는 어떠냐고 물었어. 남미에서 온 F는 따뜻한 날씨가 그립다고 했고, 캐나다에서 온 H는 그닥 춥지는 않다고 하며 내가 환산할 수 없는 화씨온도를 얘기해 줬어. 그리고 튀르키예에서 온 H는 고향에 있는 한 친구는 바다에서 서핑하고 있고 다른 친구는 스키를 타고 있다며, 그곳에서는 모든 날씨를 선택할 수 있다고 답했어. 나는 한국은 우리를 얼릴 만큼 춥다고 으스댔고 집 주변을 하얗게 덮은 눈을 떠올렸다. 아마 지금은 녹았겠지만.
그리고 많이 들은 질문 중 하나는 네가 떠나 온 나라는 지금 몇 시냐는 것! 대개 시차 적응에 여전히 시달리는 중이거든. 그렇게 힘겨워하는 틈 속에서 프랑스에서 온 J는 시간대가 똑같아서 별다를 게 없다고 했지. 한국과는 8시간 차이가 난다고 할 때면 다들 아주 먼 여정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 해주었다.
아침 열 시면 눈이 떠지고, 정오엔 배가 슬슬 고프고, 오후 세 시엔 끔뻑 졸리고, 다시 오후 일곱 시에 저녁을 먹고, 그러다 새벽 두 시에 지각한 듯이 잠드는 일. 그런 삶의 패턴에 깃드는 리듬. 우리가 머무는 공간은 철저히 시간을 통해서 전진하지. 리듬은 시간 위에 얹어지고 어느 즈음에는 그것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러한 리듬이 있었다는 것조차 까먹은 채로 몸에 밴 춤을 추게 돼. 날씨는 춤에 얹어지는 드레스나 액세서리 같은 것.
그리고 여행은 우리를 발가벗긴 채로 새로운 공간에 툭 내려놓기 때문에 이전의 리듬을 인지하게 되고 (그것이 싫었든 좋았든) 새로운 리듬과 춤을, 옷을 찾아내게 만들지. 나는 요즘 그런 작업에 몰두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전혀 모르던 곳에 도착하면 긴장하는 버릇이 있다고 얘기한 적 있나?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공간에서 압도되곤 해서 학기 시작 전 여유를 두고 이곳에 오기로 했어. 그리고 기숙사에 입주한 금요일 전까지는 호텔에 머물며 도시 여러 곳을 탐험했어. 자전거 도로와 곳곳에 널린 꽃집, 도시 중심으로 다가갈수록 널린 운하와 다리에도 이젠 익숙해졌어.
그렇지만 길을 꿰지는 못했어. 끝에서 끝까지 자전거로 달리면 두 시간 정도 걸린다는 이 조그마한 도시엔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참 많아서 심지어 어떤 집은 옆집에 맞추느냐고 살짝 기울어진 벽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통일성 있는 건축 양식들 속에서 내가 왔던 곳인지를 자꾸 확인하고는 했어.
큰 캐리어를 이고 지고 플랫에 도착했어. 발코니가 딸린 방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집의 열쇠를 받아 들었다고 생각했지.
영어에서 home과 house는 둘 다 집이지만 사뭇 다른 의미가 있다고 들었어. 후자는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집이라면, 전자는 심리적 공간으로서의 집이라고. 영화 <노매드랜드>를 본 적이 있니? 거기엔 집 대신 차를 타고 떠돌며 사는 노마드들이 나와. 그리고 주인공 펀도 마찬가지. 펀은 고장이 잦은 밴 한 대를 개조해 살아가는데, 그런 형태의 집과 딱히 불화하지 않아. 오히려 만족해하지. 그리고 어느 마트에서 자신에게 homeless냐고 묻는 상대에게 자신은 houseless일 뿐이라고 정정해. 그 둘은 아주 다르다는 듯이.
너에게는 -홈 스위트 홈-이 있니. 최진영의 소설도 떠오르지. 기억이 담긴 곳. 고스란히 나 혹은 나를 구성하는 게 담겨 내가 죽거나 사라질 코 앞에 있어도 꿋꿋이 머무를 곳. 언제나 내가 속하는 곳. 그런 집 말이야. 하이데거는 현대인이 본래적 의미로서의 공간을 상실했다고, 모두 고향을 상실한 상태라고 말했지. 그러니까 (우리를 포함한) 모든 현대인은 homeless일지도 몰라.
대학에 들어가 서울로 향한 나는 그 말을 절감했어. 서울에서 지냈던 기숙사와 작은 단칸방은 언제든 떠나도 되고 어디로든 교체될 수 있는 임시의 거주 장소였어. 공들여 꾸미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이겠지만 나는 집이 없는 마음으로 서울에 있었어.
그리고 언제였지, 밤새워 얘기하다 함께 첫차를 타고 한강을 건널 때였나, 펑펑 내리는 눈에 미끄러지며 서로를 붙잡았던 때였나, 거짓말처럼 각자 선물을 준비했던 때였던가... 오직 사람만이 나의 집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던 거 같다. 걱정은 마. 너 없으면 못 산다고 징징대면서 귀찮게 굴겠다는 말은 아니니까. 그냥 내가 스스로를 둘러싸고 싶었던 비눗방울이 어느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어떤 추상적이지만 분명 존재하는 사람들 사이의 고리라는 말이야. 우리는 아주아주 넓은 원이든 아주 좁은 원이든 이 글로나마 고리가 되어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 월세를 내지 않아도 되는 집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사실이니. 이렇게나 내 한 몸 뉠 공간이 어려운 세상에서 말이야.
그리고 새로운 집에 도착하기 직전에, 그리고 새로운 주를 맞이하기 또 직전에 나는 모국어를 함께 공부한 여자들을 만났어. 너한테 이 친구들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던가?
아무리 짧아도 반년 전에 마지막으로 봤던 K는 이제 덴마크에서 교환학생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직전이고, 출국 직전까지 지겹게도 봤던 H는 런던에서 막 교환학생을 시작하는 중이야. 교수님 성대모사를 함께하고 만우절 날 캠퍼스에서 교복을 입던... 시절은 지나고 사 학년이 된 우리는 더 늦기 전 이곳 암스테르담에서 만나기로 했어.
첫 주에 익숙한 누군가를 만나도 괜찮을까 주저했었어. 금세 마음이 노곤해져서 늘어지지 않을까, 한창 곤두서서 피로하진 않을까 싶었거든.
그런데 있지,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위한 선물을 한 움큼 준비해 왔고, 맥주를 마시다 취하고, 이별 앞에서 왕창 슬퍼했다. 생일인 H를 위해 갑자기 레스토랑 직원이 생일 팬케이크를 만들어 줬고, 온 사람들이 축하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어.
이 익숙한 사람들과 뜻밖의 환영 인사 속에서 무척이나 마음이 펴졌다. 저번 주에 말했던 그 굽어진 마음이 말이야.
그리고 다시 생각했지. 내게 집은 사람이구나.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도착한 플랫에서, 아, 우리 플랫에는 나를 포함해 열넷이 살아, 각자 화장실이 딸린 방을 쓰고, 주방을 함께 써, 다시 얘기로 돌아와서, 플랫에서 베트남에서 온 C와 A와 함께 저녁을 해 먹었다. 그러다 보니 J며 또 다른 C며 또 다른 J와 M이 주방에 들어왔고 두어 시간을 떠들다 방으로 돌아왔어. 고립되기보다는 다시 어딘가에 속해 살아가는 기분이 들었어. 지난 나의 주눅 듦을 응원해 주어 고마워. 그것도 큰 힘이 되었어.
캠퍼스 투어니 시티 투어니 이런 모든 새 학기에 딸려 오는 행사도 갔는데, 그거까지 말하다가는 새벽 세 시가 되겠다. 지금 나는 이미 세 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거든. 이번에 뭘 샀고 뭘 입었고 뭘 먹었는지 보여주려 이것저것 또 찍어 놨는데 말하기가 바빠서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대신 익숙한 여자들을 떠나보내고 플랫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주한 풍경을 보여줄게.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과 꼭 닮았지 않니. 고흐의 시간과 날씨에 도착해 있음을 다시 느낀다. 어느 곳으로 떠나는 건 거기에 쌓인 발자국에 내 두 발을 올려놔 보는 것이나 다름없나 봐.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 가로등 불빛이나 집들의 일렁이는 모습으로나마 너에게 나와 고흐가 교차한 삶의 리듬을 전해봐.
답신은 꼬박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다. 그나마 인터넷은 닳지 않아 다행이야. 트램을 타는 중에, 튤립을 구경하는 중에, 영어책 서점에서 살 것도 없으면서 서성이던 중에,... 그 어느 때에나 덜컥 습관처럼 메일함을 들락거렸어. 또 사람이 집이다(너무 정치 슬로건 같나?) 같은 말을 되뇌게 돼.
*
아무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기로 했지. 사실 나는 못 받은 편지가 하나 있다.
고등학교 삼 학년 입시를 하느라 한창 바쁠 때 나는 연애 중이었어. 수능을 앞두고는 면접 보랴 공부하랴 뭐 하랴 정신없이 바빠서 시간을 아예 내지를 못했고. 그 친구는 한참 전부터 내 생일(11월 7일이야)을 신경 쓰고 있었는데, 어느 날 편지를 써 두었으니 여유가 될 때 주겠다고 말했어. 길거리에서 만난 모르는 사람이 준다고 해도 받을 만큼 편지에 대해서는 마음이 컸던 나는 뜯어보기 전의 설렘을 기다릴 만큼의 마음도 커서 수능이 끝나면 달라고 했고, 수능이 끝나고 우리는 헤어졌다. 황당하지.
이유는 잘 기억도 나지 않고 큰 실의에 빠지지도 않았지만... 받지 못한 편지에 집착하기를 멈출 수 없었어. 일종의 편지 채무가 발생했다고나 할까.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는 들어봤어도, 차마 받지 못한 편지는 난생처음이라서 황당했고 정말 당시에는 그 친구의 독서실에 잠입하여 편지를 훔쳐 와야 할지를 고민했어. 스물 직전 말썽에 휘말릴 순 없으니 그만뒀지만, 가끔 편지하면 나는 그 받지 못한 편지의 빚을 생각해. 혹시 너는 누군가에게 주겠다고 했다가 까먹거나 불의의 사정으로 주지 못한 적이 있니. 부디 그 채무를 갚으렴. 편지 채권자는 쉽게 그 집착에서 헤어 나올 수 없으니까 말이야.
시답잖게도 말을 많이 했다. 모든 게 새로워서 자꾸만 중얼거리고 싶나 봐.
다음에는 월요일날 후다닥 쓰는 편지가 아니라 주중 도심 어딘가에서 차근히 하나하나 풀어쓴 편지를 보내고 싶다. 예약 발송까지 하는 여유를 부리며 말이야.
이만 줄일게. 좋은 한 주 되기를!
추신.
너에게 집은 어디니?
지금 네 삶의 리듬은 어떻게 흘러가니.
부쩍 리듬을 붙잡는 노래를 들려줘도 좋겠다.
2024년 2월 5일 새벽
암스테르담 교외 단칸방에서
애정을 담아,
가을
답신은 언제나 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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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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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상 항공서간 Volume 01 - 2024 Feb 5th
발행인 김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