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카로운 칼날이 몸에 닿은 것처럼 아프다. 가만히 걷고 있는데 고개는 절로 바닥을 향한다. 몸은 기댈 곳을 찾고 오뚜기처럼 일어서지 못한다. 눈은 활기를 띄지 못해 죽은 생선 눈알 같고, 어디론가 뻗는 손은 가냘프기만 하다.
벚꽃이 벌써 지고 있다. 올해 봄 가장 보고 싶은 자연의 모습이었는데, 난 구슬픈 노래를 들으면서 즐기질 못 한다. 옆에 지나가는 사람들은 눈을 먹는 것처럼 입을 크게 벌린다. 그들처럼 웃으면서 맞이하고 싶었는데, 어쩐지 올해는 혼자서 꽃길을 걷기만한 시간이 길다.
개혁이란 것이, 참 아프다. 나는 지금 내 안의 체계를 바꾸는 걸 하고 있다. 방향을 찾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나를 갈구하고 있다. 네가 원하는 게 뭔데, 왜 표현을 못해, 하고 나를 캐묻는 작업이다. 오늘이 내가 사는 날 중 제일 젊은 날이니까, 빨리 찾고 싶어 안달났다.
청소도 하지 못했다. 원랜 금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아침까지 하고 싶은 청소를 하며 쌓인 것을 쏟아내는 사람이다. 쓰레기가 생기면 그 자리에 두었고, 옷을 벗으면 바닥에 던져두었다. 그 좋아하던 인센스도 피우지 않았고, 새싹이 자라고 있는 걸 유심히 쳐다보지 못했다.
과거에 기록해두었던 우울할 때 견뎌내는 법을 기억해낸다. 무작정 걷거나, 단 것을 먹거나, 슬픈 영화를 본다. 23년도에 적어놓은 것인데, 24년도 4월의 나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걷는 것마저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먹을 것을 피하고 영화를 쳐다보지 않는다. 너무 데운 떡처럼 흘러내리고 있다.
단 하나 남은 것, 내 감정보다 처절한 음악을 듣는 것이다. 이때 아무것도 하면 안 된다. 음율과 가사가 뭐라고 하는지 느껴야 한다. 나도 나를 표현하지 못하는데, 음악이 나를 대변해주는 거 같다. 잠시만 음악이 나라고 생각해도 꽤 편안해진다.
오늘도 깨달았다. 내가 웃는 만큼 많이 슬퍼하는 사람이라는 걸.
더 나아지면 집안에 꽃을 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