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천지적 작가 시점 Jun 14. 2022

예비 형사의 첫 시체 부검 참관기

법의학의 대부, 강신몽 국과수 법의학과장님과의 만남

1996년 여름. 대학 4학년 여름방학 때 일이다.


방학하자마자 꿈꿔왔던 유럽 배낭여행을 20일 동안 다녀왔다.

귀국 후, 시차 적응하기도 전에 속초의료원 정형외과를 호기롭게 방문했다. 속초에서 행하는 부검이 있으면 참관하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졸업 후 강력반 형사를 하고 싶어서 시신 부검도 봤으면 했는데,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연락이 오지 않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당시 경찰대학은 여름방학이 4주에 불과하여 10여 일 밖에 방학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개학을 며칠 앞둔 아침 일찍 미리 상경을 했다.


그리고는 속초의료원이 안되면 플랜 B로 준비하고 있었던 신월동 국과수로 찾아갔다.

법의학 수업을 하셨던 강신몽 박사님께서는 내 뜻을 알아봐 주실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말이다.

 

법의학과장실로 가서는 “과장님 강의 들었던 경찰대학 4학년 학생입니다. 제가 법의학에 관심이 많아서 실례를 무릅쓰고 부검을 보고 싶어 이렇게 강원도에서 찾아왔습니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을 드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무모하고, 당돌했던 것 같다. 다시 그렇게 해 보라고 하면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과장님께서는 전례도 없을뿐더러 개인적으로 찾아와서는 부검을 보여줄 수 없다면서 난감해하셨다.

잠시 후...

내 예감이 맞았다!

예비 청년경찰의 의지를 높게 봐주셨는지 과장님의 가운을 하나 건네주셨다.

조용히 참관만 하라는 주문과 함께.

pixabay image


연신 고맙습니다 말씀을 드리고, 건네주시는 커피를 마시다가 벽에 있는 스케줄 표를 보게 되었다.

관료문화만 생각했던 나는 과장님 같은 높은 분도 직접 부검을 하는지 궁금해서 여쭤보았다. 그랬더니 과장님께서는 뼈 있는 말씀을 던지셨다.


“우리는 경찰과 달라서 칼 놓으면 집에 가야 해요.”


그렇다. 관료사회는 계급이 올라갈수록 관리·지휘 위주로 되지만, 의학계는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과장님의 말씀은 “실무에 능통한 경찰이 되어야겠다.”는 내 신념을 더더욱 굳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드디어 부검실.

OCN 본대로 말하라 캡처


부패된 노인 시신, 목매어 자살한 여성 시신, 교통사고로 사망한 남성 시신 등 시신 여섯 구가 은색 부검대 위에 뉘어져 부검을 대기하고 있었다.

시신을 사진으로 많이 봐서인지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부패한 시신에서 풍기는 그 매캐한 냄새 빼고는. 


부검이 시작되었다.

목에서부터 메스를 대서 가슴, 배꼽을 지나 치구까지 쭉 그었다.

가슴 양쪽 부위를 메스로 촥촥 쳐내서 벌린 후 가슴뼈를 똑똑 부러뜨려 들어내고는 심장, 간, 폐 등 각종 장기를 꺼내고...

동시에 다른 부검의는 머리가죽을 메스로 절개하고는 벌려 머리뼈에 톱질을 했다.

반달 모양으로 머리뼈를 떼어 내고는 하얀 두부 같은 뇌를 들어내었다.

각종 장기의 무게를 저울에 재고... 과정 과정마다 사진을 찍고, 기록을 했다.


부검을 보면 누구는 구토를 한다든지, 더 이상 보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기도 한다고 해서 긴장을 하고 참관을 했는데, 다행히(?) 덤덤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노인 시신은 부패가 많이 진행되어 전신이 진녹색을 띠고 있었고, 두개골을 톱으로 썰어 개방하자 부패한 뇌실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자살한 여성은 휴대폰 충전선으로 목을 매었다.  
교통사고 당한 남성은 차량이 역과 하여 다발성 장기 손상으로 인한 사망으로 판명되었다.


생애 처음으로 그렇게 부검을 참관한 후에 가운을 돌려드리고는 국과수를 나섰다.


언덕길을 내려오는데, 남모를 뿌듯함이 느껴졌다.

강력반 형사가 되어 살인사건 현장에서 오늘처럼 시신을 보고 범인을 추적하는 상상을 하면서...



그렇게 15년이 훌쩍 지나, Y 법의관님이 집도하시는 서울성모병원 부검실에서 우연히 가톨릭대학교로 자리를 옮기신 교수님을 뵈었다.

나를 소개해 주시는 법의관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교수님께서는 미소를 지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 압니다. 압니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법의학에 관심 있더니, 서래마을 프랑스인 영아살해 사건도 잘 해결하고 그래서 기억합니다.”


그렇다. 어떻게 보면 나를 지금의 강력 형사로 있게 해 주신 분이 바로 강신몽 교수님이었다.

법의학 독학을 하다가 교수님의 수업을 듣고, 강력 형사의 기본인 부검까지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경찰을 전혀 모르고, 우연히 경찰대학에 입학했다.
군대 같은 문화에 갈피를 못 잡던 중에 법의학을 알게 되면서 형사의 꿈을 꾸었다.
당시 대학 동기들은 새벽까지 법의학 책에 밑줄 쳐 가며 탐독하던 나에게 그 책 볼 노력으로 법 공부했으면 사시를 몇 번 패스했겠다고 농담할 정도로 난 법의학 공부에 진심이었다.
1994년 어린이날 지금은 사라진 종로서적에 가서 책을 샀다. / "1994. 5. 5. 내 갈 길을 위해 "라는 말이 비장하기까지 하다.



이 자리를 빌려 강신몽 교수님 다시 감사 인사드립니다.

곤란한 부검도 참관하게 해 주시고, 저를 기억까지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교수님! 건강하세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