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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 Feb 10. 2024

왜 사랑을 포기하질 못해?

사랑이냐 죽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인어공주, 로미오와 줄리엣, 베르테르, 낙랑공주 

이들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사랑'때문에 죽음을 택한 사람들이라는 거다.


장르를 불문하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은 죽음을 택하는 이유 중 하나로 여겨져 왔다. 

다소 미련한 선택 같더라도 아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의아하다. 만약 이들이 '우정'을 위해 목숨을 버렸다면, 우정과 죽음 중 하나를 택해야 했더라면 지금처럼 수월하게 납득할 수 있었을까. 아마 그건 아닐 거다. 그렇다면 '사랑 or 죽음'이라는 선택지는 자연스러워 보일까? 대체 사랑이 뭐길래? 




사랑은,


사랑은 아프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살갗이 벗겨진"상태가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하면 그저 흘러 보냈을 말과 행동들에도 쉽게 상처받게 된다. 서로는 서로에게 극히 민감해진다. 


사랑은 힘들다. 사랑은 마음뿐만 아니라 돈, 시간, 노력이 필요하다. 사랑하는 상태의 사람들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걸 느끼게 하기 위해선 그만큼의 품이 든다. 그건 사랑하는 상대를 위한 책임이고, 의무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 생기는 건 힘든 일이다. 


사랑은 불편하다. 사랑이 시작될 때의 느낌들-심장이 뛰고, 땀이 나고, 동작 하나하나가 신경 쓰이는 상태-은 편안한 상태는 아니다. 사랑의 시작점을 지나고 서로가 편해지더라도 우린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서 상대를 계속 신경 써야 한다. 신경 쓰이는 대상이 있다는 필연적으로 불편함을 동반한다. 


무엇보다 사랑은, 불편을 감수할 만큼 넘치게 행복했더라도 끝은 항상 아프고 괴롭고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또 사랑을 시작한다. 사랑하는 이에게 배신당했더라도, 사랑하는 상대를 상실하더라도. 상대는 변해도 사랑은 이어간다. 왜 우리는 끝이 아플걸 알면서도 사랑을 놓지 못하는 걸까? 왜 사랑을 해야만 살 수 있는 것처럼 구는 걸까?





나는 그 나름의 답을 '신화'속에서 찾으려 한다. 신화는 겉으로만 보면 자극적인 막장 드라마가 그지없지만 그 표면을 잘 도려내면 또 다른 의미가 튀어나온다. 정말 많고 많은 신화 이야기 중에서.


나는 크레타섬 이야기를 좋아한다. 머리는 황소이고, 몸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괴물로 불리는 불쌍한 미노타우로스의 이야기를. 그는 제대로 키울 수도, 그렇다고 죽일 수도 없는 유약한 아버지에 의해 미궁에 갇힌다. 미노타우로스의 죄목은 '존재' 그 자체였다. 그는 매년 공물로 바쳐지는 7명의 아이들을 먹으면서  그 안에서 살아간다. 테세우스가 와서 죽이기 전까지. 테세우스는 그를 사랑하는 아리아드네의 도움을 받아 아주 쉽게 그 미궁을 빠져나간다. 퍽 얄밉기 그지없다. 미노타우로스에게도 아리아드네 같은 존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 미궁 속에서 미노타우로스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탈출을 시도한 적은 있었을까? 나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모험을 떠나 위험한 일을 척척 해내는 영웅들보다 미노타우로스가 우리와 더 비슷하다고 느낀다. 우린 놀라운 능력이 없다. 하늘을 날수도 없고, 태어난 지 8달 만에 어른 팔뚝만 한 뱀을 죽일 수도 없다. 온몸이 근육질이지도 않다(대부분은). 그리고 이렇게 태어났다. 


미궁 안에서 미노타우로스는 아마 끊임없이 질문을 했을 거다. 왜 이곳에 있는 건지, 자신의 존재는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들을 말이다. 그곳에선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의문만 던질 수 있으며 스스로의 해답을 찾아가야 한다. 그 미궁을 빠져나가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미노타우로스처럼 죽거나, 혹은 테세우스처럼 사랑의 도움을 받거나


그래서 미궁은 우리의 세상처럼 느껴진다. 세상은 태어난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미궁이다.  그리고 이렇게 태어난 우린, 세상을 향해 물음을 던지고 나름의 해답만을 찾아간다. 세상을 헤쳐나가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죽거나, 사랑의 도움을 받거나. 우린 한 손엔 죽음을, 한 손엔 사랑이라는 무기를 쥐고서 살아가는 중이다. 


아마 그래서 우린 사랑과 죽음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놓지 못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사랑 or죽음'이라는 선택지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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