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하나. 분노의 신호
용서는
그대와 나 사이
모닥불 같은 것
서로를 따뜻하게 하기에
<단테의 신곡>은 주인공 단테가 살아있는 몸으로 지옥과 천국, 그리고 그 중간단계인 연옥을 경험한 이야기입니다. 단테는 살인과 같이 우리사회에서 매우 중한 범죄로 취급하는 죄뿐만 아니라, 시기, 분노 등도 지옥에서 고통을 받는 영혼들이 지은 죄의 유형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람으로서 타인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 화가 나는 것 자체를 죄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분노는 보통 증오의 감정을 동반하게 되고, 증오는 증오의 대상에 대하여 마음 속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므로 죄에 해당한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부끄럽지만, 아주 짧은 순간일지언정 분노를 유발한 사람에 대한 저주 섞인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던 경험이 있습니다.
분노에는, 정당하고 필요한 분노, 병적인 분노, 자제력 부족에 따른 불필요한 분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분노는 논외로 하고, 세 번째 분노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분노의 감정이 끓어오르는 그 순간 그것을 상대방에게 비이성적으로 터뜨리고 나면, 한동안은 너무나 당연히 상대방에게 합당한 행동을 취했다고 스스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불과 얼마의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그 상황을 객관적인 위치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고, 상대방의 언행을 전부는 아니어도 상당한 부분 이해하게 되며, 그 상황에서 자신이 대처한 반응이 지나쳤다고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분노라는 감정을 이제부터는 잠깐 ‘생각을 중단’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러면, 머지않아 분노의 감정이 걷히고 훨씬 더 세련된 대처를 하는 자신을, 아니 때로는 아무런 대처도 필요 없음을 느끼고 싱겁게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제임스 글릭의 저서 <카오스>를 보면, ‘소용돌이는 항상 순조로운 흐름과 섞여 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사람간의 관계도 자연계의 현상과 유사하다는 생각을 가끔 합니다. 마치 파동 그래프처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늘 변화하고, 가끔 그래프가 커다란 진폭으로 떨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뒤돌아보면 그저 일시적인 이탈점일 때가 더 많았습니다.
용서하는 것이 불의인 경우가 아니라면, 논리적으로 용서해야 할 이유를 찾는 것보다 어렵지만 무조건 용서하는 노력을 해보려고 합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사실 무조건 용서한 것이 아니었다는, 용서할 만한 충분한 이유와 가치가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생각 둘. 생각의 방향
마음은 참 이상합니다. 어떤 때는 누군가에게 증오를 느끼다가도, 또 어떤 때는 그 사람에게 연민을 느낍니다. 당연하겠지만, 이런 생각이 잠시 내게 멈추었습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행한 잘못된 언행을 생각하니 증오의 시간이 되고, 내가 상대방에게 행한 잘못된 언행을 생각하니 연민의 시간이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서로에게 잘못을 저지릅니다. 그 잘못을 어느 방향으로 먼저 생각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생각 셋. 나에게 잘못하는 사람이 생기는 이유
내가 타인에게 지은 잘못을 용서받는 기회입니다
나에 대한 누군가의 잘못을 용서함으로써 내가 누군가에게 지은 잘못을 용서받을 수 있다면, 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굳이 고맙게 생각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적어도 미워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내가 지은 잘못을 용서받을 기회를 주었으니까. 물론, 우리가 잘못을 뉘우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을 저질러도 뉘우치기만 하면 된다면, 잘못에 대해 가볍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일단 저지르고 나서 뉘우치면 그만이라고 무의식이 속삭일 수 있습니다. 나의 잘못은 누군가에게 고통이 될 수도 있기에, 용서를 받으려면, 누군가가 나에게 저지른 잘못을 고통스럽지만 나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개념은 그래서 공평해 보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처럼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생각 넷. 두 가지 작은 불의
제가 생각하는 근사한 사람은 작은 일에도 분노하는 사람입니다. 작은 일에도 잊지 않고 분노함으로써 더 큰 혼돈을 막고 평온을 지켜내는 사람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근사한 사람은 때로는 작은 일에 분노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작은 일에 분노하지 않고 관용을 베풀어서 그 자체로써 평온을 지켜내는 사람입니다.
전자는 타인에 대한 작은 불의이고, 후자는 자신에 대한 작은 불의입니다. 전자의 분노가 불의를 저지른 자에 대한 미움에서 비롯되지 않았을 것이고, 후자의 인내가 자신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생각 다섯. 거스르는 언행
여러 사람을 만나보면, 나를 격려하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 꼭 한두 마디 거스르는 언행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부분은 털어내면 그만이지만 때로는 기분이 상해 한동안 찜찜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 안 좋은 일을 일종의 전화위복처럼 역이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의 거스르는 언행을 아무렇지도 않을 때까지 곱씹는 것입니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면, 자신이 마치 너그러운 성인과 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거스르는 언행에 대해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느끼는 것이 거듭된다면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게 됩니다.
이렇게 역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나를 거스르는 사람이 있을 때, 언젠가 달라진 내 모습을 보여주리라 마음먹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실제로 나 자신이 발전을 이룬다면, 그것도 제대로 역이용한 셈입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후자보다 전자의 방법으로 역이용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달라진 내 모습은 그런 자극이 없어도 얼마든지 노력하여 성취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두 가지 방법을 실제로는 사용할 필요도 없는 경지에 이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 언젠가는 나에게 거스르는 언행을 하는 사람을 이런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너그럽게 바라보는, 내가 생각해도 근사한 나 자신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생각 여섯. 후회
누구의 일방적인 잘못이라기보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 시간이 멀어질수록, 그 사람으로부터 내가 받은 상처는 점점 작아져 가고, 내가 그 사람에게 준 상처가 점점 커집니다. 언젠가 내가 받은 상처는 가슴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엔 내가 준 상처가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을 돌려놓는다면 후회스러운 행동을 또다시 반복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후회는 언제나 뒤늦게 찾아오기 때문에 후회입니다. 피하고 싶은 일이 할퀴듯이 지나가고 시간이 흘러주어야만 합니다.
생각 일곱. 가장 어려운 기쁨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본능의 충족과 같은 동물적인 기쁨이 있고, 자아실현과 같은 정신적인 기쁨이 있습니다. 정신적인 기쁨이 육체적 기쁨보다 더 크고 오래가는 것은 아마도 어려움을 이겨내고 얻은 결과에 대한 만족감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대견스럽게 생각하게 되고 이에 따라 자아존중감이 높아집니다. 우리가 겪게 되는 많은 어려움 중에서 특히 어려운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에게 부당한 언행을 하는 사람에 대한 분노를 다스리는 일입니다.
어딘가에 도달했을 때의 기쁨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그곳에 도달하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용서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남을 용서하는 커다란 자신을 바라볼 때 느끼게 되는 기쁨이야말로 최고의 기쁨일 것 같습니다. 저는 아직 상대방의 잘못이 어느 한도를 넘지 않아야 용서할 수 있고, 용서할 만한 구실을 억지로라도 찾아야 용서할 수 있는 수준에 머무르는 사람인 듯합니다. 아직 최고의 기쁨을 위해 조건 없이 용서할 수 있는 수준이 못 되는 것입니다.
최고의 기쁨을 위한다는 인식조차 없이, 용서하는 주체와 용서받는 객체에 대한 구별조차 없이, 용서라고 할 것도 없이 용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서 배우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