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하나. 먼저 사과하는 이유
그런 경험을 가끔 합니다. 분명히 상대방이 나에게 먼저 잘못하거나 시비를 걸어온 것인데, 이에 대해서 내가 과하게 반응하는 바람에 상대방의 잘못은 오간 데 없고, 나만 나쁜 사람이 되는 경험입니다.
보통 다툼이 벌어졌을 때,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잘못한 경우도 있지만, 양쪽 모두 잘못한 경우가 더 많을 것입니다. 사과하는 상황도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잘못한 경우에는 온전히 자기의 잘못을 반성하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양 당사자가 모두 잘못한 경우에는, 나도 상대방 때문에 화가 나지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면 상대방도 나 때문에 화가 날 수도 있겠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점에 대해서 사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사과한다고 해서, 그리고 상대방이 끝내 나에게 사과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잘못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생각 둘. 반(半) 인사
한국에는 반(半) 인사 문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사하는 것도 아니고 안하는 것도 아닌 애매한 인사를 반(半) 인사라고 표현해 봅니다. 이를테면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은 하지 않으면서, 목인사까지는 아니지만 고개를 살짝 숙인다거나, 환한 미소는 아니지만 옅은 미소를 짓는 등의 인사 대용으로 보이는 모종의 행동들입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보통 서양인들은 길거리가 아니라 어느 정도 공동체적인 공간에서는 지나치다가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인사를 합니다. 한국인들은 모르는 사람과는 좀처럼 인사하지 않을뿐더러, 직장 등 사회에서 통성명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끼리도 인사를 나누지 않는 경우도 흔합니다. 인사를 하는 것도 어느 정도 적극성과 외향성이 있어야 하는 면이 있고, 적당히 친해지기 전까지는 소위 ‘외간’ 사람들과 친하게 인사하는 것을 쑥스러워하는 문화의 영향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인사말이 ‘안녕하세요’인데, 빈말이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안녕, 즉 안부를 묻는 것이 쑥스럽거나, 마치 내가 먼저 상대방에게 관심을 보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는 특히 이성 간에 더욱 그럴 것입니다. 먼 옛날에 여성들은 외출할 때 아예 천으로 얼굴을 일부 가렸는데, 이는 인사를 할 수 있는 태세 자체가 아니었고, 요즈음은 많이 다르겠지만, 여전히 남자든 여자든 저만치 인사하는 게 맞는지 아닌지 아리송한 사람이 걸어오면 고개를 살짝 숙이고 걷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인사를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서양인들은 상대방이 인사를 하지 않고 그냥 지나친다면 무례하거나 사교성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한국인들도 후배이거나 나이가 어린, 즉 한국의 정서를 고려할 때 먼저 인사를 할 법한 사람이 인사를 하지 않고 지나친다면 무례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한국인들은 설령 인사를 하지 않고 지나친다고 해서 상대가 원천적으로 무례하기 때문에 그런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수줍어서, 어색해서 또는 내가 인사할 만큼 친분이 있는지 아리송하다는 등의 이유로, 즉 무례한 것이 아닌 이유로 인사를 하지 않는 경우도 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켠에서는 – 물론 내가 먼저 인사를 하면 그만이지만 – 먼저 인사를 하지 않는 상대방에 대해 조금은 안 좋은 생각을 하기도 할 것입니다. 인사를 하지 않던 사람이 어쩌다 한번 인사를 하거나 – 아니면 인사를 하는 건지 모르겠으나, 고개를 살짝 숙인다거나 엷은 미소를 짓는 등의 소위 반(半)인사를 하게 되면 안 좋은 마음을 품었던 것이 괜히 미안해집니다. 그리고 다음번에는 내가 먼저 인사를 하든가, 그게 쑥스러우면 나도 모종의 애매한 행동을 취해주리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나에게 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안 좋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도 인사를 ‘개시’하여 서로 인사하는 관계가 될 수 있었던 좋은 ‘타이밍’을 놓치고 나서 그것이 관성으로 작용해서 계속 지나치거나, 그저 어색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먼저 인사를 하면 그가 표정으로 크게 내색은 안 해도 마음속으로 미안해하고 고마워하는 듯한 분위기를 단박에 느끼게 될 것입니다.
생각 셋. 미소
선행, 어려운 일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렵지 않습니다.
매일매일 따뜻한 미소를 지으면 그것으로도 충분합니다.
미소, 쉬운 일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나에게 차가웠던 당신을 다음 번에 마주친다면
내가 먼저 따뜻한 미소를 보내겠습니다.
생각 넷. 빛은 나로부터
어떻게든 잘 될 것이라는 여유로운 마음에서 비롯되는 근거 없는 막연한 낙관…, 그것이 냉철한 근거를 바탕으로 현실을 직시하는 비관보다 훨씬 가치가 있을 때도 있습니다. 비관적인 결과를 막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그 결과를 담담하게 각오하고 낙관하는 마음으로 지내다 보면, 어쩐지 낙관적인 일이 일어날 것만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낙관적인 마음이 낙관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언행을 은연중에 유발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낙관하는 일이 끝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비관했을 경우나 다를 바 없는 결과일 뿐입니다. 분명 나는 평온했고, 그 평온은 그 자체로써 값진 것이기도 하거니와, 원하는 결과가 오지 않을 때의 음습한 절망을 이겨낼 수 있는 인내력의 원천이 되어줄 것입니다.
주인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화초를 대하면 더 잘 자란다는 말도 있습니다. 왠지 심증은 가지만, 솔직히 이러한 얘기들이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식물이 아닌 사람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따라, 그 사람이 어떤 변화를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은 굳이 과학을 끌어들이지 않고서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타인이 나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그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는지 아닌지를 자신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상대방은 내가 그에게 존중과 사랑의 마음을 가진 것과 멸시와 증오의 마음을 가진 것을 구분하여 알아차릴 수 있고, 각각의 경우, 나를 대하는 상대방의 마음이 어떤 변화를 보이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비록 형식적일지라도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대하다 보면, 가식을 넘어 실제로 우리 자신의 마음이 긍정적으로 변화할 수 있습니다. 타인에게 빛을 비추려면 먼저 자신이 빛을 들어야 하고, 그러면 먼저 자신에게 빛이 비추어집니다. 원만하지 못했던 대인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부정적인 상황에서의 ‘인위적인’ 긍정적인 생각은 부정적인 현재를 지탱하는 힘이면서, 자신의 주변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실제로’ 변화시켜 긍정적인 미래를 만드는 시작입니다.
생각 다섯. 기도의 응답
기도에는 응답이 있다고 하지만, 어떤 원리로 그 응답이 주어지는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영역이 아닌 신의 영역이므로 애초에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극히 인간적인 차원으로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하거나, 참회하는 마음으로 명상과 같은 행위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덧 자신의 마음이 순화되어 가는 것을 느낍니다. 그렇게 순화된 상태에서는 마치 자욱한 안개가 걷히고 길이 보이듯,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되고, 자연스럽게 소원하는 바를 찾아갈 수 있기도 합니다.
인간관계에서의 갈등을 해소하는 데도 순화된 마음이 중요합니다. 가령, 풀려고 할수록 수렁으로 빠지는 듯한 갈등을 누군가와 겪고 있을 때, 우리는 순화된 마음 상태에서 유연한 태도로 상대를 대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 상대는 필연적으로 이에 상응하는 태도로 우리를 대할 것입니다. 선행은 우주가 갚아준다는 말도 있지만, 우주가 갚아주기 이전에 자연스럽게 순화된 마음의 교환이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다 보면, 갈등의 씨앗이 된 그 무엇에 왜 그토록 연연했었나 하는 마음마저 생길 수 있고, 어쩌면 내가 내려놓은 그 무언가를 상대방이 다시 나의 손에 쥐여 주기도 할 것입니다. 만약 기도의 제목이 헝클어진 인간관계의 회복이라면, 그럼으로써 기도의 응답이 주어지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