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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연 Jul 02. 2024

코르토 이데레초. 빠르게 똑바로 -<헤밍웨이 단편선2>

책속 글귀로 고전 맛보기 - 세계문학전집 313번.








   제프리 마이어스는 헤밍웨이를  "가장 영향력 있는 20세기 산문 스타일리스트"로 평가합니다.  

수습기자 생활을 했던 헤밍웨이는 육하원칙에 따른 간결하고 명료한 문체를 습득하게 되었고, 다양한 현장에서 기사를 취재하면서 '진실은 표충적 이야기 뒤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 세계의 수도 】 - 마드리드의 펜션에서 일하는 소년 파코는 펜션을 찾은 다양한 투우사들을 만나며,  상상으로 투우 놀이를 합니다. 그리고 현실에서 투우사 놀이를 하던 중 목숨을 잃게 됩니다. 


  *  "만약 공포라는 게 없다면 아마 스페인의 구두닦이들도 모두 투우사가 되려고 할걸.  너  같은 시골뜨기야 나보다 몇 곱절 더 겁먹을 테고"   (···)파코는 머릿속으로 이 투우 놀이를 여러 번 해 왔다.  상상속에서 너무 여러 번 황소의 뿔을 보았고, 황소의 젖은 콧등을 보았으며,  퍼뜩퍼뜩 귀를 경련시키고 나서는 머리를 수그린 채 발굽을 쿵쿵거리며 돌진해 오는 모습을 보아 왔다.  또 그가 케이프를 휘두르면 성난 황소가 자기 옆을 스쳐 지나가고,  또다시 계속해서 케이프를 휘두르면 덤벼들고,  또 휘두르면 덤벼들고,  또 휘두르면 덤벼들곤 하는 것을 보아 왔던 것이다.










 *  아무도 없이 텅 빈 식당에서는 엔리케가 냅킨으로 칼을 의자 다리에 마지막으로 붙들어 매고는 의자를 번쩍 치켜 들었다.  칼 달린 의자 다리를 앞쪽으로 내밀어 칼 두 개가 똑바로 앞을 향하게 머리 양쪽에 하나씩 뾰족 나오게 하여 머리 위로 쳐들었다.  (···)파코는 그와 마주 보고 서서 앞치마를 펴 든 다음 양쪽 가장 자리를 접어 한 손에 하나씩 꼭 움켜쥐고는 엄지는 위로,  검지는 아래로 향하게 하여 황소의 눈을 잡으려는 자세를 취했다.  "똑바로 돌진해 봐.  황소처럼 빙빙 돌아,  자 얼마든지 덤비라고."  그가 말했다. 


  *  칼이 갑자기 몸속의 단단한 부분 위쪽에 부딪치자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올랐다.  (···)파코는 처음에는 앉아 있었지만 다음 순간 몸을 웅크렸다가 곧바로 마루 위로 푹 쓰러지고 말았다.  마침내 마개를 뽑고 나면 욕조의 더러운 물이 쏴 하고 빠져나가듯이 자기 몸에서 생명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그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는 공포와 함께 현기증을 느꼈다. 


  *  소년 파코는 이런 모든 일도,  이 사람들이 이튿날,  아니 닥쳐 올 앞날에 무슨 일을 할지도 알지 못했다.  그들이 정말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또 어떻게 생을 마감할지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의 삶 역시 언젠가는 종말을 맞는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스페인어 표현에도 있듯이,  그는 환상을 가득 품은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는 삶에서 그 어느 것 하나 잃어버릴 시간의 여유도 없었고,  심지어 최후의 순간에 참회할 시간마저 없었다. 










  【 패배하지 않는 사람들 】 - 마누엘은 이제는 인기가 떨어져 찾는 이가 없는 투우사입니다. 어느 날 싼 금액을 받고 야간 경기에서 대타로 뛰게 되자, 혼신의 힘을 다해 투우 경기를 펼쳐 갑니다. 


  *  마누엘에 대한 매력은 이제 사라지고 없었다. 싸게 먹히기 때문에 라리타 대신 그를 쓰고 싶었던 것이다.  싸게 고용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를 도와주고 싶었다.  (···)"얼마나 줄 텐가?"  마누엘이 물었다.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거절해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  마누엘은 케이프를 바로 몸 앞에 펴서 양손에 접어 쥐고 황소를 향해  "우!  우!"  하고 소리를 질렀다.  마누엘이 옆으로 살짝 비켜서면서 황소의 공격에 맞춰  발꿈치를 딛고 돌며 바로 뿔 앞에서 케이프를 흔들어 보이자,  황소는 머리를 휙 돌리고 바레라에 대고 네발을 버티는 듯하더니 케이프를 향해 돌진해 왔다.  마누엘은 회전이 끝나자 황소와 또다시 마주 보고 서서 아까처럼 바로 몸 앞에 케이프를 쳐 들었다가 황소가 다시 덤벼들자 다시 한 번 회전했다.  그가 케이프를 휘두를 때마다 관중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  황소가 눈을 징그럽게 크게 뜨고는 케이프를 노리고 덤벼들었다.  마누엘은 옆으로 살짝 비켜서면서 베로니카 동작을 하기 위해 두 팔을 추켜들고 케이프를 황소 코앞에 바짝 들이댔다.  (···)황소가 지나칠 때 그 등을 스쳤던 케이프 한쪽 끝이 피에 젖었다.  좋아, 이번이 마지막이다.  마누엘은 황소와 맞서 두 손으로 케이프를 내밀며 황소가 덤벼들 때마다 같이 맴돌았다.  황소는 그를 바라보았다. 뿔을 앞으로 내민 황소는 계속 그를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  황소가 달려들자 마누엘은 몸을 슬쩍 돌리면서 물레타를 높이 쳐들어 쇠뿔 위쪽을 스쳐 지나 머리에서 꼬리까지 널찍한 등을 쓰다듬었다.  공격하던 황소의 몸뚱이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  그는 황소에 관한 것은 모조리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황소에 관해선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해야 할 행동만 하면 그만이었다.  눈으로 사태를 식별하고 몸뚱이는 생각을 하는 대신 조치를 취했다. 만일 그 일에 대해 억지로 생각했다가는 그는 끝장이 나고 말 것이다.  이제 황소와 맞서게 되자 동시에 그는 온갖 일을 의식했다.  


  *  한쪽에는 갈라진 뿔이,  다른 한쪽에는 매끄럽고 날카로운 뿔이 있었고,  왼쪽 뿔을 향해 옆으로 자세를 갖추고 빨리 똑바로 찔러야 했고,  황소가 따라오도록 물레타를 나직이 내려야 했으며, 뿔 위쪽에서 들어가듯이 황소의 두 어깨가 불쑥 솟은 사이 5페세타짜리만 한 목덜미의 조그마한 부위를 장검으로 깊숙이 찔러야 했다.  이 모든 동작을 해야 한다고 의식했지만 생각나는 것은  '코르토  이 데레초(빠르게 그리고 똑바로)'라는 말 한마디뿐이었다. 










 *  공중으로 떠오르면서 그는 위에서 칼을 힘껏 찔렀지만 그만 손에서 칼이 떨어지고 말았다.  그가 땅에 떨어지자 소가 그의 몸위로 덮쳤다.  (···)마누엘은 발가락을 딛고 일어서서 황소를 향해 칼날을 겨누면서 공격했다.  또다시 충격이 느껴지더니 마누엘이 갑자기 뒤로 던져지다가 모래밭에 쿵 하고 처박혔다. 이번에는 황소를 발길로 찰 기회조차 없었다.  


  *  마누엘은 물레타에서 칼을 뽑아 똑같은 동작으로 겨누고 황소를 향해 몸뚱이를 내던졌다.  칼이 깊숙이 끝까지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칼 손잡이까지 푹 들어갔다.  네 손가락과 엄지손가락이 황소의 몸에 파묻혔다.  피가 손가락 마디에 뜨겁게 흘러내렸고,  마누엘은 황소 위에 올라탔다. 

(···)그는 황소의 피로 뜨거워진 손으로 관중을 향해 인사를 보냈다.  오냐, 이 개새끼들아!  그는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기침이 나오기 시작했다.  뜨겁고 숨이 막히는 기침이었다.


  *  마누엘은 피로감을 느꼈다. 가슴 전체가 속으로 타는 것 같았다. 기침을 하자 그들은 무언가를 그의 입에 갖다 댔다.  모두들 몹시 분주했다.  (···)"난 경기를 잘했어.  훌륭하게 해냈다고."  마누엘이 힘없이 말했다. 
















                                                             <페이지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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