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나 당신을 기억할게 - <여름>

책속 글귀로 고전 맛보기 - 세계문학전집 368번.

by 이태연


<순수의 시대>, <이선 프롬>으로도 알려진 이디스 워튼은, 한 여름의 폭풍우처럼 짧고 강렬한 사랑을 초록빛으로 표현해냅니다. 열 여덟살 채리티는 건축학도 루시어스 하니와 불 같은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고, 임신을 하게 되죠. 그러나 약혼자가 있었던 하니에게는 그 사실을 숨긴 채 혼자 고통을 감수해냅니다. 뜨겁기만 하던 여름이 지나가고 한결 성숙해진 채리티는 어느덧 어른이 되어 있습니다.



<< 이디스 워튼의 시선 >> - "나는 창작의 희열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이 작품을 썼다." 이디스 워튼


* 채리티는 아직 모르는 게 많은 데다 감각이 무뎠는데, 그런 사실도 어렴풋하게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빛이며 공기, 향기, 색깔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몸속에 흐르는 피 한 방울 한 방울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녀는 손바닥에 투박스럽게 느껴지는 산자락의 마른 풀이며 얼굴을 짓누르는 백리향 냄새, 머리카락과 면 블라우스 속을 스쳐 가는 바람, 솔송나무가 바람결에 흔들리면서 내는 삐걱거리는 소리를 좋아했다.


* 그는 무척이나 '외로운' 사람이었다. 채리티 자신이 너무나 '외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로열 씨와 채리티는 그 쓸쓸한 집에서 서로 얼굴을 맞대고 고독의 깊이를 헤아리곤 했다.


* 채리티는 자신이 '산'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이 전보다 더 끔찍하게 싫어졌다. 그러나 이제 그 사실에 더 이상 무관심할 수가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지 그녀에게 영향을 끼치는 모든 것은 생생하게 살아 숨 쉬었다. 심지어 끔찍스러운 일조차 자신의 일부였기 때문에 관심이 갔다.


* 마침내 알았다. 그녀는 술주정뱅이 범죄자와 '어느 면에서 인간의 절반에도 못 미치고' 기꺼이 자식을 떠나보낸 어머니의 딸이었다.


* 사랑이 핏속에서 즐겁게 춤을 추는데 어디에서 태어났건, 누구의 자식이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초록 가득 오솔길




* 루시어스 하니와 함께 있을 때면 그녀는 어떤 꿰뚫을 수 없는 산안개가 자신을 감춰 주기를 바랐다.


* 두 사람은 말을 많이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과거는 이제 그들만의 은밀한 언어가 생길 만큼 다채로웠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언덕 너머 저 먼 푸른 경치처럼 기나긴 하루가 펼쳐져 있으니 하고 싶은 말을 뒤로 미루는 것이 오히려 이상야릇한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 그녀의 두 눈이 너무나 밝은 빛으로 가득 차 있어 주위의 모든 것이 하나같이 희뿌옇게 보였다.


* 늘 사랑이란 혼란스럽고 비밀스러운 무엇이라고 생각해 온 채리티에게 하니는 사랑을 여름 공기처럼 밝고 싱그러운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 찬란한 대낮에 이어 처음 밤이 찾아오면 채리티는 종종 갑작스러운 공포에 휩싸였다. 사랑이 사라졌을 때의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언젠가 똑같은 장소에 앉아 연인이 오기를 기다리는데 그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 채리티가 그대로 서서 우울한 모습으로 발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창문 밑에서 딸랑딸랑하는 자전거 벨 소리가 들려왔다. 하니가 집으로 가면서 몰래 신호를 보내는 소리였다. (중략) 그는 손을 흔들고 쏜살같이 지나갔고, 달빛이 비치는 텅 빈 길을 따라 그의 검은 그림자가 즐겁게 춤을 추었다.




비바람에 쓰러진 초록




* 채리티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하니에게 주었다. 그러나 삶이 그에게 줄 수 있는 다른 선물과 비교한다면 도대체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채리티는 이런 일을 겪은 다른 젊은 여자들의 경우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갖고 있던 것을 모두 주었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것 가지고는 짧은 순간밖에 살 수 없었다.


* 두 사람의 열정이 그 강에 가로질러 놓은 다리는 무지개만큼이나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채리티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좀처럼 앞일을 내다보지 않았다. 너무 풍요로운 하루하루가 그녀를 사로잡았다.


* 임종을 앞둔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의 어머니였다. 그렇다면 '산'에 올라가서도 이 세상의 다른 어떤 곳과 마찬가지로 외로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순간 채리티가 느끼는 유일한 감정은 피할 수 없는 고독감뿐이었다.


* 어떤 어머니가 그런 삶으로부터 아이를 구하고 싶지 않겠는가? 채리티는 배 속 아이의 장래를 생각하자 쓰라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중략)채리티는 방 귀퉁이에 누워 지저분한 방바닥이며 넝마처럼 헤어진 옷가지들이 걸린 빨랫줄, 차갑게 식은 난로 가까이 몸을 웅크린 노파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 지금까지 채리티는 도망치고 싶은 맹목적인 본능에 따라 행동했다. 그러나 한 걸음 한 걸음 옮길수록 열에 들떠 밤을 지새운 탓에 어렴풋한 이미지밖에 떠오르지 않는 현실로 점점 다가가고 있었다.


* 그의 육중한 손바닥이 채리티의 손을 감쌌고, 그녀는 너무 큰 반지 하나가 가느다란 손가락에 미끄러져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제야 자신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햇살 아래 초록



<< 채리티의 말 >> - 임신 사실을 하니에게 알리지 않은 채, 아무도 모르게 자신이 태어난 곳인 '산'으로 갑니다. 그러나 넝마같은 옷을 입고 꼬꾸라진 채 죽어있는 엄마의 모습과 만나게 됩니다. 결국 태어날 아이를 위해 척박하기만 한 그곳을 떠나게 되죠. 그리고 하니가 사준 푸른 빛 브로치를 소중히 간직한 채, 자상한 로열 변호사에게서 안정을 찾게 됩니다.


* 만약 당신이 애너벨 볼치와 결혼을 약속했다면 그녀와 결혼 했으면 해. 당신은 그 일로 내가 몹시 가슴 아파할 거라고 걱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오히려 나는 당신이 옳게 행동했으면 하는 마음이야.


* 난 로열 씨와 결혼했어. 언제까지나 당신을 기억할게.




<< 로열의 말 >> - 변호사이자 '산'에서 채리티를 데려와 키운 후견인입니다. 아내가 죽은 후 외로움에 채리티에게 청혼하지만 두 번 모두 거절당하죠. 그러나 채리티의 경멸 어린 시선속에서도 그녀를 변함없이 사랑합니다. 결국 하니의 아이를 임신한 채리티와 결혼하게 됩니다.


* 처음 너를 데리러 왔을 때도 꼭 오늘처럼 이렇게 눈이 세차게 내리고 있었지.


* 내 나이가 되면 중요한 문제와 중요하지 않은 문제를 구별할 수 있게 돼. 나이가 들면서 얻는 유일하게 좋은 변화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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