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아온 생명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by 히힛

시간은 참 빠르게 흘렀다. 주변에서 유산 후에는 임신이 금방 된다고 얘기해 주었고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1년, 2년 잘만 흘러갔다. 30대 초반에서 중반으로 넘어가는 시기가 되니 노산이 될까 마음이 조급해졌다. 나보다 늦게 결혼했던 지인들도 하나, 둘 아이를 출산했고, 저절로 되는 비교에 내가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누군가에게는 쉬운 일이, 다른 누군가에는 불가능하기도, 어려운 일 일수도 있다. 후자일 때 자기만 아는 무력감과 마음의 괴로움이 생긴다. 거리를 지날 때나 공원에 운동하러 갈 때면 보이는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 예뻤고, ‘저 아이들처럼 예쁜 아이가 나에게는 언제 생길까, 생기기는 할까.’라는 생각에 왈칵 눈물이 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에 대한 간절함은 커졌다. 커지는 간절함에 비례해서 절망감도 커졌다.


아이를 갖는 일에도 알맞은 시기가 있다고 생각하니, 몸을 건강하게 만들어서 아이를 갖는 것이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풀타임으로 일하며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운동을 하며 임신을 준비했다. 몸상태가 평상시와 조금만 달라도 혹시 임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을 조심하며 기대감을 갖고 있다가 임신테스트기를 해보고서는 실망. “마음을 내려놔야 임신이 된다더라.”라는 말을 들으면 맞는 말이다 싶다가도, ‘근데 그게 맘대로 되나?’ 싶었다. 기대와 실망이 오고 가는 반복을 몇 년 하니 ‘뭐 이번에는 되겠어? 안 되겠지.’ 하며 비로소 기대를 내려놓게 되었다. 기대를 내려놓으며 일도 파트타임에서 풀타임으로 다시 구했다.


자연유산 후 3년이 지났고 결혼한 지 7년이 지났다. 그즈음이 되니 주변에서 인공수정이나 시험관은 시도 안 해보냐고 많이 물었다.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겁이 많은 터라 쉽게 마음먹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만 자꾸 가는 상황에서 인공수정이라도 시도해 봐야겠다고 마음을 정한 시점이었다. 으레 임신테스트기를 해보았는데 두줄이었다!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세상을 다 가진듯한 기쁨이었다. 그도 기뻐했다. 그런데 한 번 유산을 겪어서일까? 기쁘다가도 이번에 찾아온 아기도 갑자기 잃을 수도 있다는 걱정과 불안이 마음의 문을 두드렸다. 안정기가 지나고 나서 주변에 알리기로 했다. 병원에도 바로 가지 않고 아이가 조금 자란 몇 주 지난 후에 가보기로 했다.


드디어 3년 전에 “임신하고 만납시다.”라고 하셨던 의사 선생님을 떨리는 마음으로 찾아갔다. 초음파검사를 통해 임신 7주 차임을 확인했고, 심장소리가 우렁차다며 들려주셨다. 마음과 눈물이 벅차올랐다. 병원에서 초음파 사진을 출력해서 산모수첩에 붙여주는데 그 작은 수첩이 너무도 소중했다. '내가 엄마가 됐구나!'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KakaoTalk_20250830_001954642.jpg 산모수첩을 받고 감격스러웠던 날



신기한 게 병원에서 “임신입니다.”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갑자기 속이 울렁울렁했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입덧의 시작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입덧을 할 수 있나 싶었지만, 입덧이 심리적인 요인이 큰 건지는 잘 모르겠다. 입덧은 사람마다 다양한데 나의 입덧은 유난했다. 밥 하는 냄새, 파 냄새 등 한식 냄새만 맡아도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평상시는 한식체질인데 입맛이 180도 바뀌었다. 회사 사람들과 점심 먹을 때 최대한 한식을 먹어보려 했으나 매번 실패했다. 그렇다고 동료들을 나의 입맛에 맞추라고 할 수는 없기에, 안정기가 지나고 나서 회사 사람들에게 임신과 입덧 상황을 알리고 점심을 따로 먹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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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전까지는 식당에서 혼자 밥 먹는 걸 못했다. 외로워 보이고 처량해 보인다는 나만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입덧이 심해 너무 힘이 드니,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의식되지 않았다. 그때 점심시간마다 먹었던 메뉴들은 대부분 밀가루로 만든 음식이었다. 빵, 파스타, 피자 등등. 그래도 먹을 수 있는 게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출근하자마자 속이 울렁거려서 화장실로 직행해 구토를 하는 일이 자주 생겼다. 그러고 나면 진이 빠져버렸다. 집과 회사가 광역버스를 타고 한 번에 오갈 수 있기는 했으나, 이동시간이 1시간 이상이었고 임신 초반에는 모든 것이 조심스럽기에 회사를 계속 다녀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되었다.


병원은 1~2주 간격으로 다니며 아이상태를 확인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갈색혈이 나오기 시작했다. 3년 전 자연유산 했던 때가 오버랩되면서 불안함에 심장이 방망이질을 해댔다. 머리에선 저절로 최악의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빠르게 병원을 방문했고 의사 선생님은 마음 편하게 쉬면서 누워있으라고 했다. 일을 하고 있는데 회사와 거리가 꽤 된다 일을 관둬야 하냐는 질문에 잠시 고민하시더니 쉬는 게 좋다고 하셨다. 몇 달 일하다가 개인사로 회사를 관두는 게 죄송했지만, 이번에는 아이를 꼭 지키고 싶었기에 상황을 설명하고 회사는 정리를 했다. 그때부터 병원을 가거나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는 침대와 한 몸인 것처럼 누워서 생활했다.


그 당시는 사실 내가 일을 꼭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가 이직했던 회사를 마지막으로 계속 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직은 쉽지 않았고 본인이 평상시에 관심 있던 인테리어 사업을 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사업도 어느 정도 기본자금이 있어야 할 수 있는데, 저축은커녕 수입보다 나가는 지출이 많았으니 매달 마이너스인 상황에서 사업은 무리였다. 이제 아이도 생겼는데 수입이 없는 이 상황이 매우 걱정이 되었다. 이 상황에 대해서 그와 이야기 나누고 대책도 세워보고 싶었으나, 그는 돈 이야기에 민감했고, 돈 이야기는 곧 싸움의 시작이 되었기 때문에, 최대한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아서 그가 알아서 하겠거니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침대에 누워 배에 손을 올리고 매일 울면서 기도했다. 그때 아이 태명이 ‘드림(Dream)’이었다. 아이를 갖는 일이 나에게는 바라고 바라던 꿈같던 일이었기에 꿈이라는 의미가 있었고, 하나님께서 보내주셨음을 인정하며 아이가 나의 것이 아님을 고백하는 2가지 의미가 내포된 태명이었다. ‘친구야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동요가 있다. 그 노래 가사를 개사해서 아이의 태명을 넣어 매일 불렀다. ‘드림아 엄만 너를 사랑해, 드림아 엄만 너를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엄만 너를 사랑해’ 이 노래를 하면 그렇게 눈물이 났다. 아이가 태어나면 손을 꼭 잡고 걷고 싶고, 예쁜 눈을 보며 눈 맞춤을 하고 싶고, 작은 몸을 꼬옥 안아주고 싶은 마음을 담아 배를 토닥이며 노래했다.


임신을 하면 그가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사소한 문제로 크게 화내는 건 여전했고, 그로 인한 나의 스트레스도 여전했다. 임신의 기쁨은 있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 임신 기간에 받는 스트레스로 인해 아이가 건강할지, 아이를 중간에 잃게 되는 일이 생기지는 않을지, 아이를 잘 낳을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다. 한 번은 그와 싸우다가 “임산부한테 이렇게 스트레스를 주면 어떡해. 아이 잘못되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라고 하니 “아이가 잘못되건 말건 상관없다.”라고 냉정하게 말하던 그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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