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의 자기소개
퇴사하고 가장 당황했던 순간 중 하나는 예상보다 자주, 너무 자연스럽게 그 질문을 받을 때다.
“지금 뭐 하세요?”
전엔 참 쉬운 질문이었는데.
“IT 기획자예요.”
“잡지사에서 마케터로 일하고 있어요.”
한 줄이면 나를 소개할 수 있었고, 제법 만족했었나 보다.
그래도 요가는 평생 하고 싶어서, 요가 지도자 과정에 등록했다. 그리고 첫 수업. 역시 빠지지 않는 자기소개 시간. ‘첫 시간에 자기소개하겠지’ 예상은 했지만, 너무 진지해 질까 봐 따로 준비는 안했다. 지금 생각하면 괜히 그랬나 싶지만.
매트를 맞대고 옹기종기 앉으니 긴장이 좀 됐는데, 다행히도 내가 첫 타자는 아니었다. 호호.. 첫 사람이 정한 포맷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면 될 일. 첫 번째 수련생이 말했다. “요가 수련 3년 차, 아쉬탕가 중심, 영업직으로 근무 중.”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나도 주민센터 요가 2년은 했는데, 이걸 2년 했다고 말해도 될까?’ ‘난 내가 무슨 요가를 했는지도 모르는데... 지도자 과정인데 이래도 되는 거야?’‘지금 무직인데... 백수라고 해야 하나? 갭이어? 낯간지러워...’
이미 머릿속에선 ‘양해를 깔아 두는 자기소개 시나리오’가 돌아가기 시작했고, 마음은 주눅과 부끄러움, 묘한 죄책감이 섞인 상태였다.
“앱 기획자랑 마케터로 일했었고요…
지금은 퇴사하고 잠깐 쉬는 중이고요…
요가는 주민센터에서 2년 정도 했어요. 스트레칭처럼 한 거라서 뭐 대단한 건 아니고… 그래도 좀 더 진지하게오래 하고 싶어서 왔어요. 잘 부탁드립니다~ㅎㅎ”
말하고 나서 스스로도 놀랐다. 왜 굳이 이전 직장 얘기를 꺼냈을까? 회사로 정의된 삶이 싫어 퇴사했는데, 스스로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니. 혹시라도 다시 회사로 돌아갈지 모르니, 미리 안전장치를 까는 걸까?
‘지금은 백수지만, 나 괜찮은 커리어 있어요’라는 밑밥 같아서 스스로 마음에 안 들었다.
2년간 했던 주민센터 요가는 나에게 꽤 진지한 시간이었다. 몸을 느끼고, 마음을 다독이며, 하루를 정리하는 루틴. 그런데 그걸 “스트레칭 같은 거요ㅎㅎ”라고 축소해 버리다니. 좋아했던 걸 작게 말한 것도, 자꾸만 ‘겸손 아닌 겸손’으로 포장하는 내 자신도 좀 실망스러웠다. 회사에선 한 줄로 나를 소개할 수 있었지만, 그 한 줄이 사라지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말문이 막혔다.
그 일이 있고, 얼마 뒤에 간 진로코칭 모임에서는 이렇게 소개했다. “자유시간에는 주로 책을 읽고요, 스트레스는 글로 풀어요. 요즘은 제 성향과 생각을 글로 정리해 보는 데 관심이 있어요.”
이번엔 제법 마음에 들었다. 요즘의 나를 설명한 솔직한 소개였으니. 근데 다음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지자체 프로젝트 중인데 야근이 많아 퇴사 고민 중이에요.”
“데이터 기반 브랜딩을 하고 있는데 이 방향이 맞는지 모르겠어요.”
역시, 진로 모임에선 다들 ‘일 이야기’를 하는구나.
그제야 ‘내가 사회성이 부족한 건가?’ 싶기도 했다.
내 말을 들은 친구는 “네가 아직 순진한 거야. 자기소개는 TPO에 맞춰서 해야지.”라고 했다.
틀린말은 아닌데 어쩐지 반감이 들었다.
나는 하난데 왜 사람들 앞에서 매번 다른 말로 소개해야하지? 그게 성숙이라면, 나는 그 성숙함을 정말로 원할까? 이 질문을 붙잡고 한참을 고민했다. 어쩌면, 그땐 내가 너무 ‘나답지 않았던 시간’에 지쳐 있던 때라 조금의 사회적 편집도 못 견딘 걸지도 모르겠다.
진로탐색중인 만큼 새로운 환경에 가는 일이 잦았고, 나를 소개할 일이 많았다. 그러면서 입장정리를 할 수 있었던 일이 있었다. PT샵에 처음 간 날 문진표처럼 정보를 적도록 내어준 종이에 '직업'을 체크하는 칸이 있었는데. '사무직'이라는 선택지가 있었다. 피티샵에선 회원이 마케터인지 기획자인지 개발자인지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우리가 가진 생활습관을 알 정도면 충분 한 것. 이 날 이후로 자기소개를 해야 할 때면 이 문진표를 떠올린다.
그리고, 최근엔 이런 자기소개를 했다. 요가원에 새로 오신 분들과 다시 한번 자기소개를 할 일이 있던 날. “앉아있는 시간이 긴 생활패턴인데, 2년 정도 파워요가 수업을 들으면서 컨디션 관리에 좋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요가를 평생 할 수 있는 운동으로 배우고 싶고, 언젠가는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오게 됐어요.”
오래간만에 만난 선배와 나눈 근황톡에서. “저는 주로 프로젝트 관리하는 일을 했는데, 꼼꼼하게 체크하고 사람을 독려하는 일이 저한테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제 성향을 좀 더 이해하고, 앞으로 어떤 방식의 일이 잘 맞을지 고민하고 있어요. 저한테 맞는 지속가능한 일의 방식이 뭘까 고민 중이에요.”
이 소개들은 전부 사실이다.
그 순간, 맥락에 맞게 꺼낸 ‘나의 다양한 버전’이고. 너무 오래 직업으로만 나를 설명해 왔다. 이제는 좋아하는 것, 고민하는 것, 그리고 지금 어떤 방향을 향해 걷고 있는지를 중심으로 나를 소개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나는 어떤 걸 어려워하고, 어떤 걸 좋아하며, 지금은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 사람인지’ 내가 속한 맥락에서 내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이 궁금해할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한번 더 고민하고 조심스럽게 말해보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