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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실남실 Apr 06. 2024

양초

양초는 한 번씩 불을 켤 때마다 가벼워진다 젖은 심지는 불꽃을 이어가고 그 아래는 딱딱하다 가끔씩 손톱자국이 깊게 파인다 심지만 타는 것이 아니다 흥건한 촛농이 심지를 완전히 삼킬 때까지 양초는 멈추지 않는다


양초는 반쯤 타들어가는 성냥과 함께 양초다

양초는 테이블과 불이 필요한 담배와 함께 양초다

꺼지면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함께 양초가 된다

쭈쭈바보다 딱딱하지만 더 늦게 녹고

쭈쭈바보다 달지 않지만 덜 끈적거리는 양초는

먹고 나면 버리는 비닐처럼 항상 무언가를 남긴다


하지만 양초는 마지막 기화되는 몇 가닥 연기와 동시에 사라질 양초를 꿈꿀지도 모른다 심지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 파라핀 속에 묻혀 묘한 흘러내림의 형태로 굳어 있다 더 이상 양초라고 불릴 수 없는 적막한 덩어리에도 가끔 손톱자국이 깊게 파인다


양초는 항상 양초가 아닌 것과 함께 온다

양초가 되기 위해서

양초가 되지 않기 위해서 양초는 타오른다


책상 위에 놓인 양초는

어느덧 책상의 일부가 되었다

다 쓰기 전까지

양초는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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