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는 현재·미래를 비추는 거울 ㅣ
제1권에서 강조한 말이다. 역사는 관련 지식을 배가시켜 준다. 교훈과 통찰력을 제공하고, 미래를 예측해 지혜롭게 대비토록 도와준다. 어느 시대의 어떤 역사를 선택해야 할까.
되도록 먼 과거의 관련 역사가 답이다. 앨리슨은 미중 패권전쟁을 설명하기 위해 2500년 전의 그리스 내전(‘투퀴디데스 함정’)을 꺼내 들었다. 동아시아의 역사 속에서 이 글의 표제인 ‘미중 패권전쟁과 한국의 선택’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례(史例)는 무엇일까?
필자는 400여 년 전, 조선 중기에 발생한 가장 처참한 역사인 ①임진왜란(壬亂)과 ②광해군의 명청 전쟁 참전, ③병자호란(胡亂)이 적실하다고 생각했다. 일련의 사건들은 중화제국 명(明)이 몰락하고, 일본과 동북의 후금(청)이 발흥, 동아시아 질서가 붕괴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모두 패권국인 중화제국과 신흥세력(일·청) 간 전쟁의 일환이었다.
조선인들은 중화질서가 무너지고 있다는 사실을 상상하지 못했다. 사대부들은 중화·유가 사상에 꽉 막혔고, 왕들은 현명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중화제국의 ‘속국’이었던 조선은 안보를 중국에 의존한 채 유비무환(有備無患) 하지 못했다. 특히 호란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임란에서도 중국에 작전권과 강화 협상권을 위임한 가운데 전 국토가 유린당했다.
3개 역사의 거울에 오늘의 한국을 비춰보자.
1. 17세기 전후의 동아시아 패권전쟁과 한국
임진왜란(1592년~1598년)
16세기말, 동아시아 국제정세는 요동쳤다. 중국 명나라는 경제난과 정치의 무능·부패로 민심이 이반돼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명의 망조를 파악한 왜구 일본과 동북의 오랑캐(후금)는 중국과 중원의 정복을 꿈꾸기 시작한다.
일본이 먼저 움직였다. 일본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통일 과정에서 생긴 불만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대륙 진출을 위해서는 조선을 교두보로 삼아야 했다. 일본은 조선에 “명을 정복하려고 하니 길을 빌려 달라(征明街道).” “그렇지 않으면 침략하겠다.”고 통지했다.
조선은 양반사회의 분열과 군역제도 문란 등으로 국방력이 취약했다. 일본군의 침략 의도와 정황을 파악하고도 조정은 ‘침략할 일이 없다’는 통신사 사신(김성일)의 의견을 따랐다. 병사의 징발·훈련과 군수물자 준비는 백성의 원성을 이유로 시행하지 않았다.
5년의 조선침략 준비를 끝낸 일본은 1592년 4월, 15만 8,700명의 대군으로 부산을 공격(1차 침략 : 임진왜란), 15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조정은 서울 사수 뜻을 비치다 행재소를 의주로 옮기고, 명에 일본의 침략을 막아달라고 간청했다.
명나라에서는 여론이 분분했으나 우방인 조선의 변란을 강 건너 불 보듯 할 수 없었다. 자국 침략을 노골화하는 일본을 조선반도에서 제압하는 것이 국가 안위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
명은 임란 발발 3개월 만인 1592년 7월부터 참전해 1년 후인 1593년 4월에는 서울을 탈환하게 된다. 명은 ‘일면 전쟁, 일면 협상’ 전략 하에 전쟁 개시 1년 후부터 일본과 강화를 추진했다. 일본도 승산 없는 중국과의 전쟁에서 한반도 이남을 할양받고 끝내고자 했다.
명이 일본의 요구를 거부, 3년 동안의 강화 협상이 결렬되자 일본은 14만 3,5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제2차 침략(정유재란)을 감행했다. 예상보다 강한 일본을 확인한 명나라는 조선의 안위가 곧 자국 안위와 직결해 있음을 인식했다.
명의 전략은 조선을 구하기보다 자국 울타리인 요동의 안정을 확보(保家衛國)하는 것이었다. 본심은 일본과 결전을 벌이거나 그들을 한반도 밖으로 축출하는 것이 아니었다. 강화협상을 통해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것이었다.
명일 양국 간의 지루한 협상에 따라 전쟁은 ‘전쟁도 평화도 아닌’ 것으로 변질돼 버렸다. 결전 의지가 없는 명군의 참전과 장기 주둔(1592.7~ 1600.9)은 조선에 극심한 폐단을 남겼다. '당나라 군대' 못지않았다.
강화론이 대두한 이후 명군 지휘부는 조선군의 진격과 결전을 방해했다. 조선은 독자적인 군사작전권을 상실해 일본군을 맘대로 공격할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1598년 2차 전쟁에서 일본이 패하고 마침 도요토미가 죽자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7년 전쟁이 끝난다.
나. 명·후금 전쟁과 조선 광해군의 균형외교(1618년~1623년)
임란에 명군의 참전은 조선의 지배층에 나라를 다시 세워준 ‘재조지은(再造之恩)의 은혜’로 인식되었다. 조선의 내부사정을 잘 알게 된 명의 영향력은 더욱 확대되었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조선이 의존할 곳은 여전히 명나라 뿐이었다.
임란 참전으로 국력을 소진한 명은 급속하게 쇠락해 갔다. 그 틈을 타 동북지역의 만주족 수장 누루하치는 세력을 크게 확장, 1615년에 청의 전신인 후금(後金)을 건립했다. 1618년에는 푸순(撫順)을 점령하고 중원의 명나라에 전쟁을 선포한다.
명은 조선에 임란 때 ‘원조(抗倭援朝: 東援)’를 베풀었음을 강조하면서 대규모 병력 파견을 요구했다. 조선을 후금과의 전쟁에 끌어들이려는 명의 전략은 전형적인 ‘이이제이(以夷制夷)’였다. 후금은 조선에 명을 돕지 말라고 경고했다.
광해군 시대(1608~1623)에 명의 조선에 대한 고압적 태도와 함께 조선 내부의 숭명 사대의식은 새로 부상하는 후금에 대한 조선인들의 재인식과 맞물리며 명·후금 전쟁에 출병하는 문제와 인조반정을 발생시켰다.
조선은 명의 요청을 거부할 수 없었다. 1619년 조선군 1만 3000여 명을 후금과의 사르후 전투에 참전시켰다. 임란에 참전한 바 있는 광해군의 판단은 남달랐다. 그는 강홍립에게 정세를 잘 파악, “상황에 맞춰 행동하라”고 지시했다. 명이 아닌 국익을 위해 “패하지 않을 방도를 찾아라!”는 것이었다.
만주지역 패권에 결정적인 사르후 전투에 명은 10여 만의 병력이 참전하고, 후금은 6만여 명이 참전했다. 결과는 후금의 대승이었다. 강홍립의 조선군은 후금군에 포위당한 채 참전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며 항복 의사를 표시했다.
광해군의 조선은 후금과의 갈등을 피해 가는 중립외교를 전개했다. 명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실리와 명분 사이에서 균형이 필요했다. 명나라가 몰락하고 후금이 부상한 새로운 정세를 파악하고, 두 세력의 중간에서 균형을 취한 것이다.
후금 또한 조선을 적으로 돌릴 필요가 없었다. 후금군은 생존한 5000여 조선군을 죽이지 않고 포로로 삼아 전멸이라는 화를 면해 주었다. 이후 조선은 압록강 입구 가도에 주둔한 명의 모문룡 부대를 지원했다. 후금과는 친선을 도모했다. 명·후금 간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고 실리를 추구해 나간 것이다.
광해군의 모호하고 이중적인 균형외교는 조선의 사대부들을 자극했다. 성리학적 명분론에 매몰된 조선의 사대부들은 ‘적들을 입으로 막고, 펜으로 물리칠 생각’이었다. 사대부들은 결국 상전인 명나라를 배신한 불의(친명배금 정책)를 명분으로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켰다.
3. 정묘호란(1627년), 병자호란(1636년)
정묘호란
1627년 후금(後金)의 조선에 대한 제1차 침입(정묘호란)은 당시 명과 후금의 대결구도의 여파가 조선으로 전가되는 형태로 일어났다. 즉 후금은 자국의 경제적 곤란을 극복하고, 바로 턱밑에서 자신들을 견제하던 가도(椵島) 동강진의 요동 책임자인 모문룡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은 인조반정 후 내정을 추스르는 데 여념이 없는 상황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조선은 결국 명과의 기존 관계를 유지하면서 후금에 해마다 목면과 명주를 세폐(歲幣)로 제공하고, ‘형제관계’를 받아들이는 선에서 강화를 맺었다. 이후 조선은 후금의 중요한 ‘경제적 생명선’이었다.
1632년 만주 전역을 석권한 후금은 북경을 공격하면서 조선에 양국관계를 형제지국에서 ‘군신지의(君臣之義)’로 고칠 것과 엄청난 양의 세폐, 정병 3만을 요구했다. 1636년 2월에는 조선이 신하의 나라로서 예를 갖춰 신사(臣事)할 것을 강요했다.
병자호란
인조는 후금 사신의 접견마저 거절하며 항전 의지를 굳혔다. 1636년 4월, 후금의 태종 홍타이지가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고 국호를 청(淸)이라고 고친 후에도 조선의 태도는 강경했다. 명나라와의 중원 패권전쟁을 앞둔 홍타이지는 먼저 조선을 제압해 후방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청은 조선의 왕자와 대신, 척화론자(斥和論者)들을 인질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조선을 공격하겠다고 위협했다. 명을 유일한 천자의 나라로 인정하고 섬겨온 조선은 명·청 사이에서 한 나라만을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섰다.
조선의 척화론자들은 청나라의 요구를 계속 무시했다. 조선에는 명에 대한 ‘재조지은’ 의식과 함께 답답한 대관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위정자들의 세계에는 오직 주자학적 교리와 중국만 있을 뿐이었다. 인조는 “전쟁이 일어나도 청을 황제국으로 섬기라는 요구를 수용할 수 없다.”고 답했다. 청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조선의 태도에 분개한 청 태종은 청‧몽골‧한인(漢人)으로 편성된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곧바로 서울로 진격했다. 조선 조정은 13일에서야 청군의 침략 사실을 알고 급히 종묘사직의 신주(神主)와 종실(宗室) 등을 강화로 피난시켰다. 14일 밤 인조도 강화도로 피난하려 했으나 이미 청군에 의해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피했다.
인조와 신하들은 남한산성에서 45일간 버텄다. 국왕이 사지에 고립되고, 나라가 망국의 위기에 놓인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조선의 지배층은 시종 척화를 주장했다. 목숨을 건 척화론에 비해 주화론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차츰 먹을 것이 떨어져 청의 공격을 당해낼 수 없게 되었다. 마침내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3번 큰절하고 9번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는 굴욕적 항복을 했다. 항복을 받은 청군은 모두 조선에서 철군했다. 만주와 조선, 동강진을 상실한 중화제국 명의 멸망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1644년 청군은 만리장성을 뚫고 관내로 침입했다. 틈왕(闖王)으로 알려진 이자성의 반란군은 북경의 자금성을 점령했다. 바로 그때 농민군의 집정을 두려워한 명의 지배층은 청군과 강화를 모색했다. 만리장성 동쪽 끝 산해관 방위 책임자 오삼계는 청군을 관내로 안내하며 청의 북경 점령을 도왔다. 명의 멸망은 청군에 의한 타살이 아니라 자살이었다.
2. 3개 사건이 주는 교훈·시사점
한반도 역사에서 거의 모든 외침은 중화제국의 팽창정책 또는 동북방의 이민족 세력이나 일본이 중국을 장악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의 소산이었다. 한반도가 취약하고 동아시아 정세가 불안정할 때 한반도 국가는 어김없이 중국과 요동, 해양 세력으로부터 비롯된 침략이나 전쟁에 휘말렸다.
격변기의 동아시아 질서는 한반도가 취약하고 혼란스러울 때 평화가 교란되고, 이때 한반도가 동북아 지역의 충돌과 모순의 소용돌이로 작용했다. 여기에 좁은 세계관에 묻혀 정세 변화를 외면했던 위정자들의 경직된 대외관과 정책 실패는 한반도를 지정학적 블랙홀로 몰아갔다.
3개의 사건은 모두 중국이 쇠락하고 주변의 일본·청나라가 부상하는 동아시아의 권력 변동기에 발생했다. 이들 간의 전쟁에서 취약한 한반도는 국가 간의 전장이 되었다. 신흥 대국의 속국이 돼 중국 진출 교두보나 병참기지가 되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참극이었다. 전쟁으로 인한 인명 피해는 물론, 문화재와 경제적 손실 또한 막대했다.
3개의 역사가 주는 교훈은 3개로 정리한다.
첫째, 그 패턴·운율을 반복하는 역사를 재확인하자는 것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 350여 년이 지난 후의 6·25 전쟁은 역사의 반복을 실감케 한다. 두 전쟁이 동아시아 국제질서 전환기에 대륙·해양 세력 간의 한반도 각축전이었다는 점, 조선과 한국이 일본과 북한의 침략 준비를 알고도 ‘침략할 리 없다’고 무시한 점, 한성(漢城)과 서울 사수를 생각도 못한 채 의주와 부산으로 정부를 옮긴 점이 유사하다.
조선과 한국이 중국과 미국에 파병을 요청한 것과 그들에게 전작권을 이양한 점, 이에 따른 주권의 제약과 전후 중국과 미국의 대 조선, 대 한국 영향력이 확대된 점, 일본의 도요토미와 소련의 스탈린이 죽자 임란과 6.25전쟁이 끝난 것도 우연이 아니다. 과거를 적극적으로 성찰하지 않아 불행이 그대로 반복된 것이다.
둘째, 지나친 사대의존을 불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통시대 조중관계에서 조선은 안보를 중국에 의존했다. 이에 따라 국민들의 정신이 비겁해지고, 혼이 부패·타락해 자율적 사고와 자강자립이 불가능했다. 그 상황에서 외세의 침략을 받으면 또 다른 외세의 개입을 간청, 구원의 대가인 ‘재조지은’의 빚은 내내 주권을 속박하는 족쇄가 되었다. 여기에 의리론과 명분론에 치우친 위정자들의 비현실적인 정세 인식도 올바른 판단과 대처를 가로막았다. 정책의 자율성 제한으로 주변국들과 융통성 있는 외교를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현대의 한미관계에서는 어떤가.
조선시대를 통틀어 유일하게 대의명분보다 실리와 국가의 안위를 우선했던 광해군의 실리외교는 그래서 귀중한 것이었다. 냉정한 국제관계에서는 가치나 명분에 집착하기보다 국익에 따른 실리적 선택이 더 중요하다. 광해군의 균형외교가 우리에게 주는 귀중한 교훈이다.
셋째, 일국이 주권과 전작권 없이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이다.
임진왜란·병자호란은 현재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 전쟁과 유사하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여러 원인이 있지만 기본은 미국이 패권전쟁에서 중국 편인 러시아를 약화시켜 후과를 최소화 해 중국과의 본격적인 전쟁에 대비하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와 중동 전쟁 이후는 어디가 될 것인가? 미국 편이 된 한국은 어떤 식으로든 중국 또는 러시아로부터 공격을 받는 제2의 호란 가능성이 없지 않다.
우크라이나와 같이 전략적 요충으로 외세의 지배를 받는 한국은 지각변동 시 위험하다. 임란과 호란 같은 유린(蹂躪)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한국의 최대 과제는 하루빨리 외세로부터 벗어나는 일(Korexit)이다.
임란과 6.25전쟁에서와 같이 또다시 외세에 의존한 채 전작권과 협상권도 없이 싸우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건 나라다운 나라가 아니었다. 광해군 시대와 달리 선조와 인조 때는 왕이 하는 일 없이, 수많은 국민들의 코와 귀가 잘려 일본으로 가고, 부녀자 50여만 명이 만주로 끌려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