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쓰담 26. 괜찮아 보이는 상태에서 멈추지 않기
아프고 나면 사람들은 묻는다.
“이제 괜찮아?”
그 질문에는 대개 하나의 전제가 담겨 있다.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괜찮은 것이라는 전제.
나는 그 익숙한 기준을
조금 의심해 보기로 했다.
우리는 오래도록
회복을 ‘복귀’로 이해해 왔다.
다시 출근할 수 있으면 회복이고,
평소처럼 움직일 수 있으면 회복이고,
남들이 보기에 이전과 다르지 않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몸은
늘 그보다 조금 더 복잡하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안쪽에서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통증이 남아 있고,
생활은 가능하지만
어딘가에 무리가 고여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가능한 한 빨리 원래 자리로 돌아가려 한다.
멈춘 시간에 대해 설명해야 할 것 같고,
비어 있는 자리에 대해 미안해해야 할 것 같고,
‘괜찮은 사람’으로 남아 있어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회복의 속도는
대개 삶의 요구에 맞춰 조정된다.
몸의 속도에 맞춰지기보다는.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동안
회복을 끝내고 돌아온 것이 아니라
돌아오기 위해 회복을 서둘러 끝내온 것은 아닐까.
‘이 정도면 됐다’는 말은
내 몸의 판단이었을까,
아니면 일상의 요청이었을까.
우리는 쉽게 말한다.
“생활하는 데 문제는 없어.”
문제없음과 충분함은
같은 뜻이 아니다.
문제가 없다는 것은
당장 멈추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일 뿐,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증거는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쓰러지지 않는 상태를
회복이라고 불러온 것은 아닐까.
이번에는
그 기준을 조금 바꾸어 보기로 했다.
다시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다시 해도 무리가 남지 않는 상태까지.
견딜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버티지 않아도 되는 정도까지.
이 선택은
특별히 용감한 일도,
대단히 감성적인 일도 아니다.
다만
몸을 수단이 아니라 조건으로 인정하는 일에 가깝다.
몸이 있어야
일도, 책임도, 역할도 가능하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을
조금 더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일.
무엇을 더 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래 지속하기 위해서.
다시 서두르지 않기 위해서.
회복은
시간이 자동으로 해결해 주는 과정이 아니라
어디까지를 ‘충분’이라 부를지
스스로 정하는 태도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괜찮아 보이는 상태’에서 멈추지 않으려 한다.
조금 더 느려도 좋고,
조금 더 비어 있어도 좋고,
조금 덜 효율적이어도 좋다.
이번에는
다시 시작할 날짜를 계산하기보다
잘 회복하는 시간을 먼저 확보하기로 했다.
회복을 미루지 않는 일.
어쩌면 그것이
나를 오래 쓰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선택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