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실

2025년 마지막 독서일기

by 그사이
<빛과 실>
한 강

* 에크리.( écrire)

프랑스어.

뜻. 글을 쓰다.




며칠째 으슬으슬 한기가 드는 날.

해가 가기 전에 마쳐야 할 태산 같은 일을 모른 채 하며 또 읽을 책을 고른다.

정말 이 책이 올해의 마지막 독서일까?

< 빛과 실>

노벨문학상 수상 후 나온 이 작은 책은 무엇을 담고 있는지 궁금하지만 독서를 미뤄두었는데 오늘은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다.

이 책에 대해선 여러 평들이 존재하고 있다. 심지어 작은 책의 값이 너무 비싸다며 굳이 출간을 했어야 하느냐고 말을 하는 사람도 보았다. 그러나 나는 수상 강연문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를 두고 구입했는데 도착한 책의 아담한 크기에 조금 당황하긴 했다. 이런저런 좋고 또는 나쁜 말들이 잠잠해질 때까지 책꽂이 깊숙이 묻어두고 곰삭히는 중이었다. 세상이 주목하지 않을 때까지 오래 둘 생각이었다.

그래야 책을 순수하게 읽을 수 있다.


“아니 이런!”

며칠 동안 아껴 읽고 싶은데 자꾸만 진도가 나가 단숨에 읽어버렸다. 책을 다 읽고서 가만히 책을 안아 두근대는 심장에 가까이 대었다. 자그마한 검정색 책이 금방 내 체온이 전해지기에 딱 알맞다.

무언가 먹먹하고 가득히 차오르는 기분이라는 것 외에 더 이상 무엇을 독후감으로 써야 할지 나는 모르겠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완독 하였으나 예상대로 마지막 독서일기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동산이 2025의 마지막 독서가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끌리듯 펼친 <빛과 실>을 하루 만에 마지막 장을 덮으며 그 어느 책도 마지막 30번째 독서일기가 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었다. 박완서 작가님이 거닐었던 작은 동산의 감동을 살짝 뒤에 기다리시게 했다.

"선생님,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하니 특유의 개구진 표정으로 "그러마.' 하신다.

처음부터 계획하지 않았는데 -살림과 독서. 그사이- 연재북의 첫 번째 책으로 <소년이 온다> 를 골랐던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저 표지 사진은 무슨 의미일까?

노란 띠지를 벗기고 한참을 보아도 잘 모르겠다. 소설 <흰>의 서늘했던 배냇저고리 흑백사진도 한참을 들여다봤던 생각이 난다. 흑백 사진 속 식물의 펼친 작은 잎이 뾰족한 것이 어린 단풍나무가 분명한데 뭔가 따뜻함이 깃든 저 네모난 흰빛은 어디에서 온 걸까?


<빛과 실> 은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의 제목이다. 강연 전문과 시 그리고 에세이로 이루어졌다. 이 책에 담긴 시는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의 아픔이 느껴지는 시들과 사뭇 다른 느낌을 주었다.

이제 누군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 김용택 시인의 <꽃도 안 들고>에게 좀 미안하지만 주저 없이 말할 것이다.

한강의 코트와 나라고..

코트와 나
한강

나는 오십 년 늙고
코트는 이십 년 늙었네

서른 살 겨울에 산

긴 겨울 외투는 평생 이거면 되겠다 했던
종아리를 덮는 검정색 코트.

- 중략-

나는 오십 년 늙고
코트는 이십 년 늙어
어느 날 헤어질 서로를 안고 업고
겨울볕 속으로 걸어가네



코트와 나를 여러 번 다시 읽다가 파란색 펜으로 필사한 다음에야 독서를 이어갈 수 있었다.

정원 일기에 이르렀다. 예상하지 못한 식물을 키우는 이야기가 나오니 신기하고 반가웠다. 찾았다. 나와 작가의 공통점.

내가 나중에 조그만 마당을 가지게 된다면 꼭 키우고 싶던 미스김 라일락 나무와 엄마의 산소에 갔을 때 계단 옆에 예쁜 흰꽃이 피어있어 검색해 본 꽃댕강나무 그리고 옥잠화, 맥문동, 호스타 꽃이 피는 작은 화단이 꼭 한번 보고 싶어진다.

진딧물과 응애와 전투를 벌이다가 약을 치고 나서 개미도 쥐며느리도 사라진 고요한 화단을 보고 느꼈을 서늘한 마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글을 쓰다 말고 빛을 따라 각도를 맞춰 거울을 움직이고, 실눈을 뜨고 벌레를 잡는 한강 작가의 모습이 그려지니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책을 모두 읽고서야 작가가 직접 찍은 사진에 대해 알았다.

작은 집의 작은 화단은 북쪽 흰 벽 앞에 위치할 수밖에 없었고, 작가는 식물에게 햇빛을 반사시켜 전해줄 탁상용 거울을 놓아주었다. 거울을 통한 빛이 나무를 비추고, 북향의 흰 벽에 빛의 창문이 생겨났다.

시시각각 변하는 해를 따라 글을 쓰다가도 위치를 바꿔주었는데 어느 식물은 그럼에도 빛이 부족했고, 어느 식물은 꽃을 피우고 훌쩍 자랄 수 있었다. 작가의 마음을 담은 거울은 개수를 점점 더해가고 있다.

한강 작가가 식물에게 빛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글을 통해 나를 비추는 것처럼 따스하게 느껴졌다.

한기는 어느샌가 도망가 버렸다.


노벨 문학상 시상식 일정은 참으로 대단했다. 시상식과 만찬 그리고 강연과 이어진 대담 형식의 일정들을 생중계로 모두 지켜보았다. 얼마나 꿈같은 일이었나 싶다.

1년이 지나 새로운 스타가 탄생했어도 우리말로 읽을 수 있는 조금 더 깊이 이해가 가능한 글을 쓰고 앞으로도 쓸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는 한강뿐이다. 작가가 선택한 단어를 한 글자씩 온전히 흡수할 수 있는 이 시대에 살아있음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그때, 스톡홀름에서 울려 퍼진 아홉 살 작가의 시가 내게 금실이 되어 묶여버렸다.

한강 작가의 소중함을 느낀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 주는 금실이지.

한 강
작가의 책상과 작은 화단
거울을 통해 비추는 빛
한강의 글은 흰 눈과 참 잘 어울린다




< 빛과 실> 을 끝으로 <살림과 독서. 그사이> 연재북. 1편을 마칩니다.

다사다난했던 2025년의 마지막 글이 독서일기여서 저는 참 마음에 듭니다. 많은 책을 읽진 못했지만 지난 1년간 책과 함께 지냈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를 포만감이 듭니다.

살림을 하느라 분주히 집안을 휘젓고 다니다가 생기는 작은 틈에 책 몇 장을 읽으며 이전에 읽은 내용을 잊어버릴까 봐 적은 메모를 한데 모은 지극히 개인적인 글이기도 했습니다. 언제나 연재를 끝낼 때면 여러분은 어떠셨을까 궁금해집니다.

재미있으셨기를 바라며 한 해 동안 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새해에 다시 재밌는 책을 가지고 연재북 2편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때 또 와주세요. 꼭이요~"

"독서대야, 계속 잘 부탁해."

마지막으로 부실한 손목을 대신해 책을 꼭 잡아준 독서대에게도 감사를..


2025년 12월 31일에.

Sincerely you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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