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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눈 내린 그곳

by 목다올 Dec 20. 2024


   한밤중에 들었더라면 으스스할 것 같다. 깊은 산골짜기에서 고라니가 ‘메에엑 메에액’ 하고 가래 끓는 소리로 기절할 것처럼 운다. 암컷을 찾는 수컷의 부름인가, 숨넘어가는 단말마의 마지막 비명인가. 어디선가 수꿩이 ‘꿔꿔 꿔어엉, 꿔꿔 꿔어엉’ 하며 산등성이 너머로 날아간다. 함박눈이 내릴 터이니 빨리 집에 오라고 집 나간 까투리와 에미 따라 나간 꺼병이를 부르는 신호처럼 들린다.       

   

   눈은 펑펑 쏟아지고, 야영객들도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한 송이 두 송이 눈꽃이 내려 땅을 적시고, 흙 알갱이는 물을 머금기 시작한다. 마치 며칠 굶주린 산짐승처럼 알갱이는 물을 쭉쭉 빨아들인다. 이어 내린 눈송이가 깊숙이 땅을 비집고 들어가 숨구멍을 메워버린다.

빈 곳을 꽉 채우고 나면, 다음 눈송이가 얕은 살얼음판을 만들고, 그 위에 이역만리 헤어졌다 만나는 연인들처럼 눈은 포개지고 그 위에 또 포개졌다. 이윽고 능선과 계곡은 하얀 눈밭으로 변해버렸다.


   종일 눈이 내려 야영장 지붕은 종적을 감추었고,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만이 여기가 골짜기이고, 저기가 길임을 말해준다. 사기막골 밤나무와 떡갈나무와 소나무는 눈옷을 뒤집어썼다. 그 모습이 달빛 어린 수묵화처럼 처연하고 정갈하다.

새 한 마리가 밤나무 가지에서 휘파람 소리를 내다 발자국만 남긴 채 날아간다. 나뭇가지에 쌓인 눈, 땅 위에 덮인 눈, 그 눈 위에 밤새 도둑눈이 또 내렸다.     


   아이들은 눈을 뭉쳐 눈사람을 만들고, 나뭇가지로 눈과 코와 입을 만들고, 솔방울을 주워 눈동자를 만들고, 마른풀로 콧수염을 붙였다. 놀이터에서 아빠도 엄마도 아이와 함께 여덟 살로 돌아간다. 그네를 타고 눈싸움하고, 그러다 눈 위에 그냥 드러눕는다. 그 자욱이 선명하게 남았다.     

눈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솔가지에 가린 눈동자가 윙크하듯 인사를 한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다, 눈사람이니까. 단지 눈사람을 쳐다본 내가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산막에도 눈이 쌓이고 먼저 내린 눈이 밤새 녹아 고드름으로 쑥 자랐다. 그 끝에 맺힌 물방울이 떨어지고 흙이 파이고, 또 떨어지고 흙이 파여 아기 손바닥만 한 물웅덩이를 만들었다.

웅덩이는 물꼬를 터서 고랑으로 흐른다. 고랑으로 흐르는 물이 넘쳐흘러 길 위의 발자국을 지워버렸다. 산성에 밤새 내린 도둑눈 흔적을 따라 다시 길을 나선다.     


   자취를 감춰버린 사람 발자국, 산짐승 발자국을 찾아 나는 오늘도 길을 내고 산에 오른다. 푸른 소나무 숲을 지나 침목 계단과 암릉을 넘어 산등성이에 올라선다.

지나온 그 흔적을 지우지 마라. 발목이 푹푹 빠질지라도 누군가 그 표적을 따라 걸어가야 할 길이다. 종일 내리던 눈도 자취를 감추었다. 도둑눈 위에 새겨진 발자국이 궁금해 자꾸 뒤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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