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한겨울에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다. 토론토 도심 거리엔 초저녁이라 행인 발길조차 끊어지고, 북극에서 불어오는 혹독한 된바람에 목덜미가 저절로 움츠러들고 살점이 에이는데 말이다.
아이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 옆에는 엄마인 듯한 여인이 전신에 까만 차도르를 두른 채 손을 내밀어 구걸을 한다.
여인의 복장을 보니 무슬림인 듯한데, 그녀의 자그마한 손바닥엔 1달러와 2달러 동전 몇 닢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동전 몇 개가 잡혔다. 여인의 손에 주머니 동전을 몽땅 쥐여주고 바삐 걸음을 재촉하여 집으로 갔다.
나는 매일 학교와 집을 걸어서 다녔다. 토론토에 있는 대부분의 학교가 서울의 대학로처럼 시내 중심가에 몰려 있어서 삼십여 분 걸으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이곳은 서울과는 달리 한참 기다려야 버스나 전차 트램을 탈 수 있어 걸어가는 시간이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시간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내가 걸어 다니는 길에는 대형 빌딩이 즐비하다. 겨울에는 빌딩 덕트에서 뜨거운 바람이 나오는 곳이 몇 군데 있는데, 그곳에는 어김없이 노숙자들이 이불을 덮고 자고 있었다. 추위를 피할만할 곳엔 언제나 그들이 있었다.
그 아랍 여인과 아이는 그날 처음 맞닥뜨렸다.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곳엔 뜨거운 바람이 나오는 곳이 아니었다.
‘지금쯤 그 여인은 아이를 데리고 따뜻한 보금자리로 돌아갔을까? 아니면 이 추운 겨울밤에 길거리에서 잠자리를 마련해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을까? 아이가 차가운 길바닥에 앉아있는 것도 힘들 텐데, 지금 그 아이는 엄마와 함께 무사히 이 밤을 지내고 있을까?’
저녁을 먹고 책상에 앉았는데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을 그 여인의 모습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던 그 아이의 얼굴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에 책을 펴도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먼 이국땅 캐나다에까지 와서 추운 겨울 저녁 길거리에 내앉아 구걸하고 있는 그 여인과 아이가 너무 애처로웠다.
다음 날 학교 가는 길에 어제 그 여인과 아이가 앉아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어디로 갔을까? 이 추운 겨울밤 북극의 찬바람에 밤새 혹시 동사는 하지 않았는지, 밤을 무사히 지냈으면 아침은 먹었는지, 딴 곳에서 아이와 함께 길바닥에 주저앉아 구걸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이름 모를 슬픔과 분노가 목구멍으로 치밀어 올랐다.
홈리스 쉘터(shelter)도 있고 소수자 커뮤니티도 이곳저곳에 있는데, 어찌하여 그 여인과 아이는 굶주림과 추위에 떨면서 길거리로 쫓겨났을까? 영어 멘토와 커피를 마시면서 한참 동안 그 아랍 여인과 아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도대체, 왜? 그들은 한겨울 길바닥에서 구걸할 수밖에 없었는가.
우리 둘은 의견을 나누다가 눈물이 글썽글썽한 채 서로를 바라보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한국인, 영어 멘토는 인도인, 우리는 아랍 사회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 여인과 아이를 통해 아랍을 바라보았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부족했던 그해 겨울, 한국 서울에서도 그런 현실을 보곤 한다. 그때마다 나는 토론토의 그해 겨울이 연상되고 이름 모를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