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2) 목련을 관찰하며 시간을 배우고 추억을 얻다
12월 마지막 주가 되었다. 저녁이면 자투리 털실을 이어가며 뜨개질을 했다. 머지않아 눈 내리는 겨울이 올 것이고 어김없이 종업식도 다가올 것이다. 이번 안녕은 학교를 영영 떠나는 긴 안녕이다. 어떻게 이별을 할까. 어린이와 안녕은 시와 이야기와 문집을 나누며 할 것이다. 목련은, 3년간 날마다 보아온 목련과는 어떻게 이별을 해야 할까, 뜨개 옷을 떠서 입히기로 했다. 뜨개옷을 입히고 나자 기다렸다는 듯 눈이 왔다.
어린이들과 3년 동안 목련에 대한 긴 서사를 만들어왔다. 살아오면서 이토록 나무 한 그루와 깊은 우정을 나눈 적이 있을까,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좋아하는 꽃과 나무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출근길에 날마다 인사하던 분홍 장미가 그렇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어린이가 없다. 나무 아래 엎드려서 시를 쓰고 사진을 찍으며 깔깔댈 어린이가 없는 것이다. 어린이를 떠나고 목련 나무를 떠나는 일이 쓸쓸하고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괜찮다. 힘든 일 사이사이에 목련 이야기 같은, 오래 간직할 좋은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면서 어린이들 사진을 올려둔 밴드에 들어가 보았다. '목련'하고 검색을 하니 봄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했던 활동 사진이 주르륵 뜬다. 하나하나 클릭해 본다.
3월, 목련나무를 보러 간 날이었다. 목련은 담장 부근 구석진 곳에 있었다. 어린이들이 부러 그곳에 올라갈 일이 없는 자리에 있었다. 어린이들은 익숙했지만 몰랐던 공간을 찾아낸 즐거움으로 사진 찍기에 몰두했다.
3월의 목련은 겨울나무 같았다. 별 감흥이 없을 수도 있지만 털북숭이 꽃눈 아린 덕분에 어린이들 눈은 예민해진다. 누군가 '여기 아린 떨어졌어!', 소리치면 너도 나도 눈을 밝히며 아린을 찾았다. 하나씩 주울 때마다 귀여운 강아지를 만난 듯 즐거워한다.
목련꽃을 보려면 기다려야 한다. 인내심을 가져야 하는데 어린이들은 목련에게 아침 인사 하는 일조차 잊곤 했다. 변화가 더디면서 목련 관찰이나 목련, 안녕하는 인사가 지루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런 어린이들에게 지난해 어린이, 이제는 6학년이 된 형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작년 5학년 꽃씨들, 지금은 6학년 형들이지요. 작년에도 지금처럼 목련을 꽃씨반 나무로 정해놓고 일 년 내내 산책하면서 관찰했어요. 말도 걸고 나무 아래서 시도 썼어요. 목련이 떨어지면 풍선을 불기도 하고 즙을 내기도 했어요. 교실에서 키우던 장수풍뎅이가 죽자 모두 슬퍼하며 목련 아래 묻기도 했어요.
선생님은 제자들에게 목련 선물을 받았어요. 방금 떨어진 목련잎과 바람막이처럼 얇은 아린이요. 선생님이 좋아하는 것들이라 제자들이 주워온 거 같아요.
6학년이 된 제자 어린이가 방문했다. 손에는 아기 같은 목련 꽃잎과 아린이 들어있었다. 값지고 귀한 선물이었다. 꽃씨 어린이들이 나를 떠나 한 살 한 살 나이가 들더라도 마음속 시가 시들지 않기를 오래도록 바랬는데 제자가 시를 가지고 왔다. 꽃씨 어린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목련을 보면 시 한 편을 외우게 될 것이다. 꽃잎이나 아린을 줍게 될 것이다.
3월 22일, 꽃눈 아린 두툼한 게 하나 둘 벗겨지고 마지막 보드라운, 바람막이 잠바같은 아린이 남았다. 꽃몽오리가 드디어 아린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어린이들은 감탄하며 그 모습을 그리고 글로 썼다.
시간이 지났다. 순식간이었다. 잠깐 한눈 판 사이에 목련이 피어버렸다. 학교 담장 구석 자리가 하얀 빛으로 가득한 날 어린이들과 목련 아래로 갔다. 더 자주 목련을 찾을 걸 하는 아쉬움을 담아 어린이들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이런 시간은 놓치면 안 되는 낭만 있고 아름다운 시간이다.
-목련나무를 보고 왔다. 목련이 다 떨어져 아쉽다.(조재* 4.8)
필대로 피어 부풀고 벌어진 목련이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떨어진 목련은 떨어지는 대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었다. 막 떨어져서 한숨 죽은 목련은 풍선으로 불기 좋았다. 며칠 동안 어린이들과 목련나무 아래에서 목련풍선을 불었다. 교실까지 목련 꽃잎을 들고 와서 풍선을 부는 어린이도 있었다.
놀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목련 풍선 불기에 이어 새로운 놀이가 시작되었다. 목련 즙 내기 놀이다. 5학년 12살 어린이들은 소꿉 장난 하던 저학년 시절로 돌아간 듯 점심을 먹고 나면 목련나무 아래로 갔다. 놀이는 일주일 내내 이어졌고 목련 꽃잎은 떨어지기 무섭게 사라졌다. 짓궂은 남자 어린이들은 목련 꽃잎 좀 떨어뜨려달라고 목련 신에게 '비나이다 비나이다' 빌기까지 했다.
진정한 협동심이 어린이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정우는 목련 즙을 담을 작은 병을 가져왔고 학급 어린이들 대부분이 힘써 모은 즙은 작은 병으로 들어갔다. 그 뒤 향수병의 즙은 소식이 감감했다. 창가에 놔주었더니 이상한 냄새가 나서 버렸다는 말도 있다.
목련은 시간이 흐르면서 갈변했고 감자칩처럼 부스러질 듯 바삭해졌다. 어린이들은 조금씩 목련을 잊었다. 다 함께 나들이하는 날만 겨우 관찰을 하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 목련이 스치듯 지나가면서도 안쓰러워 보였던 걸까.
그림자 / 정해*
저기 있는 목련 뒤에
듬직한 그림자가 우뚝 서 있네.
해가 앞에 있으면 그림자가 뒤에
해가 뒤에 있으면. 그림자가 앞에
목련은 외롭지 않겠네.
평생 같이 있어 줄 그림자가 있어서
목련이 지고 나서는 목련 이파리를 관찰하기로 했지만 목련에 대한 관심은 이전보다 시들해졌다. 마침 출근길에 자목련이 있었다. 자목련은 흰 목련 보다 조금 늦게 피었다. 자목련을 잘 모르는 어린이들이 있을 듯하여 자목련 여러 장을 주웠다.
어린이 수만큼 주운 뒤 어린이들에게 자목련 꽃잎을 나누어주었다. 먼저 꽃잎을 보고 떠오르는 낱말을 생각해 보았다. 자색 고구마, 홍합, 아기 발바닥, 씻은 후 얼굴 같은 재미있는 말들이 나왔다. 관찰을 한 뒤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고 쓰고 싶은 글을 썼다.
시를 쓰는 어린이들도 있었다.
자목련 / 강도연
선생님이
주신 자목련 하나
꼭 반들반들
가지 같다
꼭 깨끗하게
씻은 내 얼굴 같다
닮은 것이
많은 자목련
껍질 / 김서우
선생님이 주신
자목련
꽃잎 하나
고구마
껍질
포도 껍질
물고기 비늘
닮았네. (4.9)
꽃잎 한 장이 시를 불러왔다. 자목련을 처음 본 어린이들은 흰 목련 말고 자주 빛깔 목련도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여름이 지나고 2학기가 되었다. 어린이들은 까맣게 잊었던 목련을 다시 보며, 짙어지고 무성해진 목련을 보며 , 다시 꽃눈 아린이 생긴 걸 보며 대견해했다.
▪목련 잎이 나오고 아린이 또 나올 좋은 상상도 못 했다. 2세 아린은 아니겠지만 나에게는 2세이니 2세 아린이라고 호칭을 정해줬다. 그럼 이제 이 과정이 반복되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목련이 될 수 있겠다.(김현민 8.29)
시간은 가을로 흘러갔고 목련에 대한 추억은 켜켜이 쌓여갔다. 그림책 <나무는 좋다>를 읽을 때가 되었다.
어린이들은 그림책을 읽으면서 저마다 자신의 경험 속에 있는 나무를 떠올리는 듯했다. 그중에는 우리 꽃씨반 나무인 목련도 있었다. 책을 읽은 뒤 자신이 좋아하는 나무, 경험 속 나무이름을 쓰고 좋은 까닭을 써보기로 했다.
- 목련나무는 좋다. 목련 꽃잎으로 즙을 짜서 신기한 향수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AI시대에 직면하여 고민과 과제가 많다. 어떤 학자는 AI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인간 존재를 증여하는 것이라며 위험성을 경고한다. 어린이들은 수업이 끝나고 학원 가는 사이 어둑한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 게임을 한다. 행복한 주말 햄버거 식당에 간 식구들은 각자의 폰으로 각자의 세계에 접속한다. 대화는 점점 사라지고 대화의 소재는 폰에서 본 영와, 뉴스와 게임이 이야기가 된다.
꽃씨반 어린이들은 살아가면서 계속 봄을 맞이하고 목련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써 온 추억, 목련 풍선과 즙, 향수와 시를 생각할 것이다. 여전히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있고 AI와 접속하겠지만 일 년 동안 목련과 만난 일은 결코 시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2월, 종업식을 며칠 앞둔 날이다.
-선생님, 우리 마지막 목련 산책해요.
어린이 하나가 제안을 한다. 나도 생각을 했지만 틈을 보고 있었다. 말이 나온 김에 겨울 산책을 했다. 어린이들은 시간을 실감하는 듯했다. 3월, 시간의 변화를 공부하기 위해 시작했던 때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목련 꽃이 피고 지는 동안 어린이들에게는 무엇이 피고 무엇이 사라졌을까. 관찰 일기를 보니 할 말이 많은 듯하다. 상념이 담긴 문장들이 많이 보였다.
마지막 목련 산책을 마쳤다. 그리고 종업식이 왔고 나는 어린이들을 떠났다. 5월 어느 날, 어린이 몇이 한데 어울려 전화를 했다.
-선생님 뵙고 싶어요.
-그래, 이다음에 보자. 열심히 책 읽고 공부하렴.
-저 목련 관찰 일기 쓰고 있어요!
-오, 정말! 반갑구나. 사진 찍어 보여주렴.
어린이들은 종종 목련 나무를 찾는 듯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