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일 하기 후기
돌이켜보면, 내가 중학생일 때도 고등학생 때일 때도 대학생일 때에도 들을 때마다 당황스러웠던 질문이 하나 있다. '무엇을 좋아하냐'는 질문이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겠을 뿐만 아니라 생각해 본 적도 없어서 멍청한 표정으로 금붕어처럼 눈만 껌뻑거리곤 했다. 그러면 상대방은 나의 이해를 돕기 위해 질문들을 다양하게 바꿔서 물어보았다. '취미가 뭐냐', '스트레스를 어떻게 푸냐', '주말에 뭐하고 노냐' 등등으로. 그럴 때마다 난 더욱더 미궁으로 빠졌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내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공부하기 바빴다. 한 시간을 오분 단위로 쪼개서 공부했다. 좋아하는 것은커녕, '해야 하는 것'만이 가득했다. 잠잘 시간도 부족해서 책상 위에서 코 박고 자는 내게 취미생활이라니.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냐는 질문은 더 당황스러웠다. 스트레스 풀 시간이 어딨나? 스트레스 풀 시간에 더 열심히 살아서 스트레스를 주는 근본 원인을 타파시켜야지. 그래야 스트레스가 없어지는 거지, 한바탕 노래를 부르거나 여행을 떠나는 것은 피상적인 해결책, 아니 회피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무식이 통통 튀었던 덕분에 내 몸뚱이와 정신상태는 30년 넘게 사랑 한번 못 받고 그저 공부만 하고 일만 했다. 내 세계 안에는 내가 계획한 것들과 성취해야 하는 것들만이 가득했다. 좋아하는 것이고 나발이고는 없었다. 인생을 프로젝트처럼 대했다. 다음 달까지 이뤄야 할 것들, 내년까지 이뤄야 할 것들, 5년 후까지 이뤄야 할 것들 이 가득했고, 그 데드라인을 지키기 위해서 지금 뛰어야 했다. 들판의 꽃이나 나무의 여린 잎이나 불그스름한 노을을 보고 느낄 여유는 개나 줘버린 지 오래였다.
그리하여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대답조차 못하던 인생을 살아온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바싹 말라버린 매미 같다. 여름 한 철 빡시게 울고 생을 마감한, 바싹 마른 채로 아스팔트 바닥에 누워 저승으로 간 매미 같다. '나를 사랑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셀프 러브란 단어는 들어봤지만 그 뜻이 무엇이냐고, 도대체 나를 사랑하는 것은 어떤 행위인 거냐고 묻고 앉아있는 서른여섯 살 매미 같다. 내 몸뚱이에 뽀뽀를 쏟아부어줘야 나를 사랑하는 것인지, 어깨에 샤넬 가방을 얹어줘야 나를 사랑하는 것인지, 금가루가 뿌려진 수정과를 마셔야 나를 사랑하는 것인지. 뇌가 순백하기 그지없는 질문을 하는 내게 에린은 '좋아하는 것을 찾아보라'는 숙제를 주었다.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고, 작게 시작하자고, 카페에 가서 아메리카노에 치즈케이크 먹는 것 좋아하지 않느냐고, 그럼 그것부터 시작하면 된다고. 미술관에 가는 것, 맛있는 브런치를 먹는 것, 금요일 저녁 영화 보는 것부터 시작하자고.
에린의 말을 듣자마자 정말이지 따악-하고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나도 좋아하는 것이 있었구나, 맞아 이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지, 이런 사소한 것들도 '좋아한다'는 범주에 속하는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다. 소소한 행복들이 내게도 존재했구나, 내 일상을 이뤄주고 있었구나, 나만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다.
그래서 그 주말, 제일 좋아하는 카페에 랩탑을 들고나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블루베리 치즈케이크를 주문해서 창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나를 열심히 먹이며 애써 인지했다. 현재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주고 있으며, 이것은 곧 나를 사랑해주는 일이며, 그럼으로써 자기애를 높이고 있는 중이라고. 그리고 호기롭게 랩탑을 펼쳤다. 단순히 커피와 케이크에서 기쁨을 찾는 것을 넘어서서 내가 극강으로 좋아하는 일 하나를 해주겠다면서. 끝장나는 셀프 러브 한 개 해주겠다면서.
여리여리한 햇살이 들어오는 카페 창가에 앉아서 장군처럼 브런치 작가 신청서를 작성했다. 글을 쓰는 것은 나의 피가 돌게 하는 일이다. 책상에서 코 박고 자던 시절에도 난 글을 쓰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꼭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해야 하는 것들에 치여서 애써 억누르고 있었는데,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 곧 나를 채워주는 것이고 그러한 삶이 궁극적으로 의미 있다는 것을 한바탕 앓아눕고서야 깨달았다. 생각들이 활자화될 때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나의 생각들과, 활자의 수만큼 늘어나는 나의 존재들. 이 땅에 열렬하게 존재하고 싶고 그 흔적을 남기려는 지극히 동물적인 본능이 내가 쏟아내는 활자들로 하여금 차고 넘치게 채워졌다. 그래서 이제는 열심히 쓰기로 다짐했다. 열심히 존재하기로 했다.
그래서 '셀프 러브'에 관한 글을 쓰겠다고 했다. 나와 비슷한 시간을 건너는 사람들을 위하여 나의 힘들었던 시간을 공유하고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 내가 겪었는 무기력감, 좌절감, 불안감, 배신감, 불만족 감 등등을 나누고, 그것을 극복하는 열쇠는 '셀프 러브'에 있으며, '셀프 러브'를 연습하는 글을 쓰겠다고 했다. 구체적으로는 심리 상담사와 상담했던 내용을 대화 형식으로 쓸 계획이며, 상담사가 추천해준 여러 가지 해결책들, 그것들을 시도해보고 연습해 본 나의 후기들을 적겠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후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비몽사몽 핸드폰을 확인하는데 브런치 작가 합격 이메일이 와 있었다. 너무 기뻐서 바로 잠에서 깼다. 브런치 작가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단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가슴 벅찬 아침이었다. 그 축하를 계속 받고 싶고 계속 설레고 싶어서 이메일을 '읽지 않음' 상태로 바꾸었다. 그러고 나서 한 시간 후에 또 열어서 또 읽어보고 또 축하받고 또 설레고를 하루 종일 반복했다. 모자란 동네 언니 같았지만 혼자서 정말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말 그대로 온 우주가 좋아하는 일 마음껏 하고 살라고 등 떠밀어주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마치 유치원 때 발표시간에 몸 베베 꼬고 망설이다가 삐죽 대며 한마디 했더니 우와 잘했다고 박수받았던 때 같았다. 이렇게 무대가 마련되었으니, 나의 생각과 삶을 열심히 나누려고 한다. 그리고 나의 글이 결국에 누군가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위로까지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