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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레 언니 Oct 26. 2024

션이 부러워? 난 같이 달리는 우리가 더 멋져

무릎통증으로 나만큼 매일 3~5km를 달리지는 못했지만 걷다 뛰다를 반복한 약 2주 만에 남편의 뱃살이 눈에 띄게 정리되었다. 스퍼트를 내서 땀 흘리기를 좋아하던 사람이 욕심껏 달리지 못하자 나도 안타까웠다. 남편은 유튜브로 러닝자세, 통증 완화, 테이핑 방법 등을 자주 찾아보았다. 특히 마라톤을 십 년 넘게 해온 션의 유튜브를 자주 보는 듯했다. 


장거리 마라톤을 오래 했어도 관절이 20대라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81.5km를 달리면서도 아내의 불만이 없을 정도로 가정적이라니. 남편이 갑자기 한 마디를 외쳤다.

'션이 부러워? 그 부부는 같이 러닝 하지는 않지? 난 같이 달리는 우리가 더 멋져.'


남편과 함께 달리며 그가 내뱉는 말들이 나를 놀라게 한다.

가족이 아닌 '남'에게는 한 없이 차가운 사람, 그를 아는 사람들은 나와 통화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의외라는 반응을 보인다. 저런 다정다감함이 있었는지 몰랐다며. 달리기를 하면서 그의 다정한 면을 많이 꺼내는 시간이 되었다.


'이번 달은 당직이 언제지?'

'지방 출장이 있으니까, 이 날은 내가 일찍 들어와야겠네?'

'내일 아침, 저녁 식사는 내가 준비할 테니까 그다음 날 준비를 해줘.'

'이번 주말에는 스케줄 있나?'

'다음 주에 아이들 치과예약 있는데, 연가낼 수 있어?'


맞벌이 부부는 각자의 회사 생활에 맞춰 양육 부담을 나눠지는 것에만 서로의 삶과 대화의 전부를 채웠었다.

달리기 시작 전에 웜업 하면서, 달리기를 끝내고 쿨 다운하면서 아이들의 학교, 생활문제, 시댁과 친정 얘기, 우리 부부의 현재와 미래까지 대화의 장르가 넓어졌다. 


'아이들한테도 우리 달리는 습관을 보이는 게 좋은 것 같아.'

'언젠가 아이들도 같이 달리면 좋겠다.'


남편이 바빠서 같이 달리지 못하는 날에는 내가 달린 기록을 캡처해서 남편에게 보낸다. 그러면 달리기 코스를 보고 이런 답장이 온다.

'와 오늘은 예쁘게도 달렸네.'


남편이 말한 '예쁘게도 달린 코스'는 호수공원 두 바퀴 코스이다. 러닝 어플을 켜고 내가 달린 러닝코스가 GPS로 기록되어 페이스에 따라 초록, 하늘, 빨간색 등으로 그림처럼 발걸음 자국이 남는데 'GPS드로잉' 또는 'GPS아트'라고 한다. GPS드로잉 아티스트들은 달리거나 사이클을 타고 미리 계획한 루트대로 움직이면서 라지스케일 그림을 완성한다. 내가 이날 그린 호수공원 코스는 깔끔하게 옆으로 길게 퍼진 동그라미 그림이다, 두 바퀴를 뛰어 10km로 만든 그림이니 정말 깔끔하다. 학교 운동장을 달릴 때는 같은 동그라미를 수십 바퀴 돌기 때문에 보기에도 숨이 차고 어지럽다. 엊그제 그린 우리 '동네 한 바퀴 코스'는 삼각김밥 같다. 

 

SNS에서 유행 중인 멍뭉이 코스,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코스 같은, 보기에도 '아트다'할 만한 그림을 그릴 실력은 아직 되지 못하지만 그릴 수록 건강해지는 우리만의 멋지고 독창적인 GPS아트를 만들어 기록하는 것도 우리 부부의 로망이다. 


대회가 1주일 남았다. 그전에 10km를 두 번 정도 더 뛰어봐야 할 것 같아서, 토요일임에도 지방 출장에 간 남편 없이 나 홀로 10km를 뛰었다. 왼쪽 팔에 스마트폰을 고정하기 위해 산 암밴드가 5km를 넘어서부터는 무겁게 느껴져서 허리에 고정하는 러닝벨트를 사용했다. 팔이 확실히 가볍다. 동네 한 바퀴를 도는 오늘의 코스에는 신호등 있는 횡단보도 네 개, 주유소 두 개, 드라이브스루 두 개를 지나야 하기 때문에 차가 오는지 자꾸만 뒤를 돌아봐야 해서 왼쪽 고개가 뻐근하다. 


'동네 한 바퀴' 코스로 삼각김밥을 그리고 나서도 목표한 거리에서 2km 정도 모자랐다. 둔치를 따라 직선거리를 추가했더니 삼각형에 나무를 꽂은 것이 수박바 같기도 했다. 뒤에서 빠른 걸음으로 오던 남편이 없어서 '혼런'하는 이 시간이 외롭긴 해도 '혼런'한 기록을 캡처해서 보내주면 누구보다 기뻐해 주고 기특해하는 남편에게 더 자랑하고 싶어서 열심히 달렸다. 점심때 발레 수업을 다녀왔는데도 기록이 괜찮았다, 지난번 기록보다 1분 10초를 앞당겼다.


거리: 10km

소요시간: 1시간 3분

페이스: 6분 19초


5km까지는 5분대 페이스여서 언더60를 달성하나 했는데, 역시나 발레 후 러닝은 무리였나 보다. 


남편이 출장에서 돌아왔다. 새벽부터 운전을 시작해 저녁 8시가 돼서야 집에 온 남편은 역시나 내 기록을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오늘 같은 스케줄을 일주일에 최소 두 번 해야 하는 남편은 허리와 무릎이 성할 리가 없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복대를 찾는다. 후끈한 열파스라도 당장 붙여주고 싶지만 켈로이드 피부 트러블을 겪는 것이 더 고통이니 그것마저 해줄 수 없다. 약국에 가서 젤 타입 파스를 사다가 발라주었다.


달리고 싶어 하는 남편을 두고 혼자 달린 기록이 괜스레 미안해진다. 


취미로 발레를 영유하며 세운 목표는 할머니 발레리나이다.

남편과 함께 시작한 달리기라는 취미의 목표는 하프마라톤, 풀마라톤이 아니다. 물론, 1km부터 차곡차곡 쌓아 10km를 왔으니 10km 대회를 몇 번 더 하다 보면 하프, 풀을 도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일지도 모른다. (내년에 참가할 대회 일정을 벌써 캘린더에 표시해 두었다.) 우리의 최종 목표는 달리는 할머니, 할아버지. '달리는 부부'이다. 머리에 서리가 내리고 등이 굽어도 손 잡고 달리는 부부. 


어쩌면 우리 부부의 달리기 출발선은 예식장이었다. 그 달리기의 종료지점이 아직 어디인지 모르지만 지금처럼, 아니 지금보다 더 건강히 같이 달려보련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본인의 묘비에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라고 쓰고 싶다고 했다. 우리 부부는 하루키처럼 대단한 마라토너도 아니고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초보 러너라서 거창한 표현은 사치일 수 있다. 그래도 하루키에 영감을 받아 마치는 말을 적어 보고 싶다.


'적어도 우리 부부는 손을 잡고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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