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운 여인>과 닮은 듯, 너무 다른 영화 <하얀 궁전>의 명대사
1990년 가을 두 편의 영화가 개봉된다. 우연인지 기획인지 둘 다 신분 차이가 나는 남녀의 사랑이야기다. 그런데 구도는 완전히 정반대다. 한편은 상류층 남자와 길거리 여자의 사랑, 다른 한편은 이십 대 후반의 엘리트 남자와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사십 대 중반여자의 사랑이야기다. 한편은 대박이 나고 한편은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 유명한 <귀여운 여인(Pretty Woman)>이 전자고 후자는 오늘 소개할 영화 <하얀 궁전)(White Palace>이다.
다시 봐도 <귀여운 여인>은 흥행하지 않을 수 없는 영화였다. 돈 많고 잘생기고 젠틀하기까지 한 에드워드(리처드 기어)의 넘치는 사랑을 받는 비비안(줄리아 로버츠)을 부러워하지 않을 여자가 있을까? 그런가 하면 남자들에게는 콜걸과도 사랑다운 사랑이 가능할 수 있다는 로망(?)을 안겨주는지도 모르겠다. 줄리아 로버츠가 그려내는 비비안이라는 캐릭터가 그 만큼 진실되고 상큼하고 매력적이니까.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이 영화의 가장 큰 키워드는 인생 대역전이다. 비비안은 숨어서 하는 사랑에 만족하지 않고 당당한 관계를 요구하고 에드워드는 이를 받아들인다. 이로써 비비안은 단번에 콜걸에서 상류층으로의 신분상승에 성공한다. 비현실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신분상승을 갈망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에 기꺼이 속아 넘어가고 싶다.
반면 <하얀 궁전>는 망할 수밖에 없는 영화였는지도 모른다. 역시 잘 생기고 잘 나가는 이십 대 청년 맥스 (제임스 스페이더)는 우연히 식당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사십 대 중반의 노라(수잔 서랜든)를 만난다. 젊고 우아한 아내를 자동차 사고로 잃고 그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맥스와 역시 아들을 백혈병으로 잃어버린 노라는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듯 깊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맥스에게 노라는 가족이나 친구에게 내보일 수 없는 부끄러운 존재다. 넘을 수 없는 신분계층의 벽을 체감하고 ‘주제 파악’을 한 노라는 멀리 떠난다. 홀로 남겨진 맥스, 노라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고 그녀를 찾아 나선다. 노라 수준에 맞추려고 그 좋은 직업, 집을 다 버리고 허름한 단칸방을 얻어 스스로를 끌어내리며 노라의 사랑을 되찾으며 영화는 끝이 난다.
중년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젊은 남자이야기는 그 반대 경우만큼 흔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새로운 것도 아니다. 영화 <졸업(Graduate)>(1967)에서는 풋내기 대학생이 로빈슨 부인에게 빠지고, <사랑할 때 기꺼이 버려야 할 것(Something’s Gotta Give)(2003)>에서는 매력적인 의사로 분한 키아누 리브스가 노작가 다이앤 키튼에게 반하고, <언페이스풀(Unfaithful)>(2002)에서도 청년이 중년 유부녀 다이앤 레인을 유혹한다. 영화보다 더 극적인 현실 스토리도 있다. 잘 알려진대로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같은 반 친구의 엄마이기도했던 문학교사와 결혼해서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 영화 속 인물이든 현실 인물이든 청년이 사랑하는 중년 여인들은 누가봐도 하나같이 매력적이다. 로빈슨 부인(앤 밴크로프트)과 코니(다이앤 레인)는 중산층 부인들로 세련되고 원숙미가 넘친다. 다이앤 키튼이 분한 노작가와 마크롱의 선생님이었던 브리짓 여사는 지성미가 넘친다. 젊은 여성의 생기발랄함에 못지않는 또는 그를 훨씬 능가하는 그녀들만의 비장의 무기 말이다.
<하얀 궁전>의 노라는 다르다. 그는 못배우고 교양도 없고 스스럼없이 경박함을 드러내기도한다. 사는 집만봐도 엉망이다. 허름한 집이어도 남자친구가 오면 청소라도 할법한데 여기저기 늘어진 물건들로 어수선한 집을 그대로 방치하며 산다. 자식을 먼저 보낸 ‘어미’가 무슨 염치로 한가로이 집을 가꾸면서 멀쩡한 정신으로 산단 말인가. 그렇다. 그녀의 정돈되지 않은 삶은 스스로를 벌하는 자기 파괴적 에너지의 발현이다. 어쨌든 노라에게서는 영화 속 주인공 여성이 공식처럼 갖춰야 할 미덕을 찾아볼 수 없다. 남부러울 게 없는 맥스가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노라 같은 여자에게 빠진단말인가? 인물 설정부터 설득력이 없다. (그만큼 우리는 순수를 잃었다.) 게다가 <하얀 궁전>은 불편한 전복을 시도한다. 보통 신분격차가 나는 남녀의 사랑이야기에서는 신분이 낮은 쪽이 높은 쪽으로 편입되는 결말을 택한다. 반면, <하얀 궁전>에서는 신분이 높은 맥스가 화려한 인생을 모두 버리고 남루하기 짝이 없는 노라의 세계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다. 지금보다 더 ‘잘’ 살고 싶어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외면하고 싶은 결말이다. 이런 이유로 <하얀 궁전>은 아마도 앞으로도 큰 조명을 받지는 못하는 영영 잊힌 영화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는 진한 여운을 남긴 영화다. 두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맥스에게서 진공청소기를 선물받고 모멸감을 느낀 노라가 맥스를 쫓아버린 장면과 맥스가 노라의 신발 끈을 묶어준 장면이다. 첫 번째 장면은 비루한 자신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여주라는 노라의 외침이었고, 두 번째 장면은 기꺼이 자신을 숙여 사랑하는 사람이 제대로 걸을 수 있게 해주는 맥스의 헌신의 표현이었다.
“I’m not trying to change you, I just want you to be happy.”
당신을 바꾸려는 게 아니에요. 당신이 행복하길 바랄 뿐이에요.
처음에는 노라를 개조하려던 맥스의 대사는 그래서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는 상대가 아닌 자기 스스로를 탈바꿈하며 동사(verb)로서의 사랑을 실천한다.
커버사진: Unsplash의Hush Naidoo Jade Phot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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