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 집에서 통칭 '이사모 회장'이라고 불린다. 이사모란, 이불을 사랑하는 모임의 약자인데 이불에 대한 내 마음은 사랑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애착과 집착, 그 중간 어디쯤에 존재하는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이불에 대한 내 사랑은 가족과 지인 모두가 학을 뗄 정도로 유별나다. 글을 쓰는 이 순간마저 집에 두고 온 이불이 떠오른다.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가 사랑일까?
이렇게 이불을 사랑하는 나지만 모든 종류의 이불을 다 좋아하는 건 아니다. 이불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까다로운 기준을 적용하고 나름의 이불 철학이 있다. 먼저, 남들이 포근하고 부드럽다고 생각하는 극세사 이불은 취향이 아니다. 극세사 이불 특유의 묵직한 무게와 덮었을 때의 부드러운 재질 탓에 간지러운 느낌이 싫다. 자고로 내 취향 이불은 가벼워야 한다.
그렇다고 가벼운 여름용 이불은 또 취향이 아니다. 이불의 기능 중 하나인 포근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여름용 이불 특유의 가볍지만 까칠한 표면은 최악 중 최악이다. 그래서 따로 여름용 이불을 구비해 두지 않았다. 더위를 잘 타지 않는 체질인 것도 있지만, 마치 때밀이 수건을 덮고 자는 기분을 느끼고 싶지는 않기에.
적당히 가벼우면서 부드럽고, 포근한 이불. '60수 아사이면서 면 100%'인 이불이 내가 이불을 구매할 때 꼭 전제로 하는 조건이다. 여기서 폴리가 일정 비율 이상 들어가거나, 60수 이하의 아사면이 사용되면 나의 이불 후보에서 바로 탈락한다. 주변 사람들은 그게 그렇게 중요한 요소냐고 묻지만, 나에게는 수면의 질을 높여 주고 매일 퇴근이 기다려지는 이유 중 하나다.
이런 내 이불 사랑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그럼 여행 갈 때는 어떻게 하냐고. 솔직한 심정으로는 따로 이불 캐리어를 장만해서 모든 여행에 챙겨가고 싶은 심정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에 그저 눈물을 머금고 숙박시설에서 준비된 이불을 사용한다. 특히 호텔에 머무를 때면 집에 두고 온 내 자식 같은 이불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린다. 호텔용 이불은 지나치게 무겁고, 포근하지도 않고, 부드럽지도 않으니까.
나의 이불 사랑에 대한 슬픈 일화가 하나 있다. 이전에 늘 덮고 자던 애착 이불이 있었는데, 너무 많이 덮은 탓에 이불이 찢어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직 다른 이불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던 나는 더 찢어지지 않게 조심하고 또 조심해서 덮고 지냈다. 하지만 비밀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불에 대한 내 애착을 집착이라고 딱 잘라 얘기하는 이불 킬러인, 엄마에게 발각된 것이다.
그리고 외출하고 돌아온 날, 내 이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불의 형태는 사라진 채 익숙한 패턴의 방석이 되어 돌아왔다. 엄마의 재봉 솜씨는 생각보다 더욱 훌륭했지만 나는 반의반의 반의반 정도로 작아진 내 이불, 아니, 방석이 되어 돌아온 이불을 보고 절망했다. 이후에 엄마에게 물어보니 그냥 버렸다면 내가 너무 슬퍼할 것 같아서 나름의 선물 겸 방석으로 만들어 준 거라고 대답했다. 엄마는 이불을 향한 내 마음이 종이도 아니고 그렇게 쉽게 접힐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이불 밖은 위험해'는 이제는 너무도 익숙한 문장이 되었다. 여전히 현실을 마주하기는 외롭고, 사회는 점점 더 차가워진다. 대신 집에 돌아가면 나름의 언어로 나를 위로하듯 온기를 나눠 주는 이불이 있기에 오늘도 나만의 작은 피난처로 몸을 숨긴다. 그곳에서는 사회적 가면을 쓸 필요도 없고, 하루 끝에 무너진 몸과 마음을 온전히 맡길 수 있다.
피곤한 몸을 웅크리고 이불을 덮으면 세상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은 것 같은 편안함이 느껴진다. 현실의 빛과 소음을 차단하고, 호흡만으로도 살아 숨 쉬는 존재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이불 속이다. 어쩌면 나를 감싸 안아 준 시간만큼, 나 또한 이불을 품고 살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오늘도 이불속에서 꿈을 꾸고, 하루 종일 수고한 나를 보듬어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