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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우 아빠 Sep 12. 2022

세한도 (김정희)

소나무는 시들지 않는다

세한도(歲寒圖) - 김정희 (출처 : 공유마당 CC BY)


한겨울의 추위가 지나간 후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

(자한편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彫也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


 위 구절에서 한겨울의 추위는 위기나 고난을, 소나무와 측백나무는 언제나 한결같은 태도를 상징합니다. 겨울에도 잎이 푸른 침엽수를 활용하여 위기에도 굴하지 않는 의지와 고난에도 변하지 않는 절개를 강조한 말입니다. 소나무는 계절과 상관없이 늘 푸른 잎을 가진 특성으로  예전부터 많은 사랑을 받으며 시와 그림의 소재로 자주 활용되었습니다. 소나무의 인기는 지금도 여전합니다. 2022년 산림청 국립과학원의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로 소나무가 뽑혔다고 합니다.




 〈세한도〉는 《논어》의 한자 원문을 제목으로 사용한 그림입니다. 세한(歲寒)은 한겨울의 추위를 말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위 구절을 뜻하기도 합니다. 예전부터 논어를 전부 암기할 정도로 통달한 사람들은 각 장의 내용을 언급하거나 인용할 때, 그 문장의 첫 단어나 대표성을 띈 단어를 사용하여 전체 내용을 전달하였습니다. 따라서 세한은 한겨울이라는 기본적인 뜻과 동시에 논어의 위 구절을 암시하는 단어로도 사용됩니다. 


 〈세한도〉는 김정희의 작품이라는 대표성과 제목에 어울리는 이야기성이 더해져 1974년에 국보가 되었습니다. 조선의 그림에 대해 관심을 가져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 봤을 정도로 유명한 그림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실제로 보게 되면 왜 사람들이 명작이라고 하는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세한도〉는 네 그루의 나무와 어색해 보이는 집 하나가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단순하고 메마른 느낌에 실망감이 들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그림의 진가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이 그림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하나는 그림의 탄생에 관한 일화입니다. 김정희는 1840년에 55세의 나이로 제주도로 유배를 갔습니다. 요즘의 제주도는 낭만의 섬이지만, 조선 시대에는 가장 가혹한 유배지가 섬이었습니다. 유배 생활이 길어지자 김정희는 사람들에게 잊혀 갔습니다. 병조참판(국방부 차관)과 성균관 대사성(국립대 총장)으로 잘 나가다가 추락하여 회생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외면과 멸시를 받는 삶이 이어졌습니다. 이때 몇몇 제자들은 끝까지 김정희를 따랐는데 그중 한 명이 이상적(李尙迪)이었습니다. 이상적은 통역관으로 중국에 갈 때마다 귀한 책을 구해서 김정희에게 보냈습니다. 김정희는 변하지 않는 이상적의 태도에 감명받아서 유배를 시작한 지 5년째 되는 해에 그에게 〈세한도〉를 선물로 건네며 ‘오랫동안 서로 잊지 말자(長毋相忘 장무상망)’는 뜻의 도장을 찍어 건넸습니다. 


 다른 이야기는 그림의 소장에 얽힌 일화입니다. 이상적은 〈세한도〉를 자신의 제자에게 물려주었고, 일제강점기에는 후지쓰카 지카시라(藤塚隣)라는 일본 학자에게 건너갔습니다. 후지스카 지카시라는 그림을 일본으로 가져갔습니다. 그러나 서예가 손재형(孫在馨)이 그 소식을 듣고 찾아가서 두 달 동안 그를 설득한 끝에 작품을 얻어 다시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재 전해지는 〈세한도〉는 손재형에 의해 긴 두루마리 형태로 다듬어졌습니다. 두루마리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남긴 감상과 평가가 들어 있습니다. 손재형은 해방 이후 조선서화동연회라는 단체의 초대 회장을 역임하며 ‘서예(書藝)’라는 단어를 처음 만든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전까지 서예는 중국에서 부르던 서법(書法)이나 일본에서 칭하던 서도(書道)를 그대로 따라 불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했던 김정희는 명문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학문과 예술 분야에서 탁월한 기량을 선보인 선비였습니다. 청나라 학자로부터 ‘조선 제일의 유학자(海東第一通儒 해동제일통유)’라고 불릴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인재였습니다. 그러나 완벽하게 보이는 그의 인생에도 큰 굴곡이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첫 번째 굴곡은 젊은 시절의 사별입니다. 16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20살 때에는 부인과 스승이었던 박제가(朴齊家)가 죽었습니다. 10대 초반에 이미 할아버지와 양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했으니 그의 청소년 시절은 죽음의 그림자로 덮여 있었던 셈입니다. 두 번째 시련은 장기간의 유배생활입니다. 김정희는 과거에 급제한 34세 이후 각종 요직을 거치며 출셋길을 달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나이 55세에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유배생활은 무려 8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처럼 긴 유배 생활로 인해 추사체(秋史體)가 탄생했다고도 말합니다. 


 추사체는 김정희의 호를 따서 이름을 붙인 글씨체입니다. 추사체는 곧고 바른 글씨가 아닙니다. 획의 두께와 각도가 일정하지 않고, 비례도 고르지 않습니다. 정확성보다는 예술성이 높은 글씨입니다. 김정희는 새로운 서체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업적을 이룩한 셈입니다. 조선에는 많은 명필이 있었지만 자신의 서체로 널리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은 사람은 드뭅니다. 그는 서체를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실험과 연습을 했을까요?


 김정희는 문인화가로서 섬세한 기교보다는 선비정신이 반영된 예술성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는 아들에게 수시로 글을 쓰고 책을 많이 읽으라고 당부하였습니다. 그래야 그 기운들이 모여 문자에서 향기가 나는 듯한 느낌이 작품에서 전해진다고 조언하였습니다. 이 조언은 지금도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 라는 용어로 지식인들에게 두루 쓰이고 있습니다. 김정희도 자신만의 향기와 기운을 단단하게 쌓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습니다. 그는 평생 동안 열 개의 벼루를 구멍 내고, 천 개의 붓을 닳게 만들 정도로 연습을 했다고 합니다. 


 〈세한도〉는 김정희의 정신과 노력 그리고 일화가 보태져서 더욱 의미가 크게 자란 그림이 아닌가 싶습니다. 



소창다명 사아구좌(小窓多明 使我久坐 작은 창으로 많은 빛이 들어오니 나로 하여금 오래 앉아 있도록 하는구나) - 김정희 (출처 : 한국데이터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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