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고 화해하고
여름방학이 지나고, 가을이 되었는데도 그들 사이에 냉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담임인 내가 1학기 때 나서서 화해무드를 조성했어야 하나 후회를 하던 어느 날, 체육 시간에 은수가 애영이(그 셋 중 하나)와 함께 어깨를 치며 깔깔 웃는 모습을 발견했다.
“어? 너네 뭐야?” 하고 물으니 그 아이들은 배꼽을 잡고 웃으며 “어제 화해했어요.”라고 말했다. 나중에 일기장을 통해 알게 된 사연은 이러했다. 애영이가 수업 시간에 떨어뜨린 머리끈이 은수 쪽으로 날아갔는데, 은수가 아무렇지 않게 그 끈을 주워서 돌려주었고, 카톡으로 아까 왜 그랬냐고 물으니 ‘다시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라는 답장이 왔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이 아이들은 다시 1학기 때처럼 뭉쳐 다니게 되었고, 냉전기에 중간에 껴서 괴로워했던 DMZ 같은 여학생 하나를 추가해 5인조의 대그룹을 형성하게 되었다.
1학년 아이들은 다투자마자 그 상황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관련자를 불러 모아 잘잘못을 따져 물으면 금방 “미안해”, “괜찮아” 같은 말들이 기계적으로 쏟아져 나온다. 눈물까지 한바탕 쏟았어도 잠시 후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즐겁게 놀곤 한다. (간혹 사과하기 싫다며 고집을 부리기는 하지만 아무튼 그 다툼이 오래가지는 않는다.)
6학년 아이들은 어른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다투고, SNS에서 절교하고 화해하며, 단순히 한 명이 사과한다고 마무리되는 게 아닌 복잡한 경우가 많아서 어른의 개입이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남학생이라고 늘 평화로운 것은 아닌데, 주로 몸을 부딪히며 놀다가 과격해져서 다치거나 서로 놀리다가 감정이 격앙되어서 다투는 경우가 많다. 심한 상처가 아니면 부모님께 공유되지 않아서 어렸을 때처럼 양쪽 집에 전화해서 사과를 하네 마네 하는 일이 적다.
미취학부터 저학년 까지는 엄마의 취향에 맞게 어느 정도 친구를 골라서 아이 곁에 데려다 놓을 수 있을 것이다. 두 아이가 서로 마음이 통해 잘 지내게 될지, 아닐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지만 따로 만나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부모의 주도하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키즈카페나 공원 등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다면 우정이 돈독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우정이 영원할 거라는 기대는 금물이다.
내 친구들 중에는 초등학교 동창들과 지금은 전혀 연락도 하지 않고 만나지도 않지만, 엄마들 모임에서 새어 나오는 이야기로 서로의 근황을 파악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처음에는 아이들의 입학 초기 적응과 사적인 만남을 위해 어른들이 주도하여 우정의 씨앗을 심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의 우정은 '한두해살이' 풀처럼 다 자라 수명을 다하고, 그 자리에 어머니들의 우정이 싹트고 꽃피어 '여러해살이' 아름드리나무가 된 셈이다. 이런 케이스는 주변에서 꽤 찾아볼 수 있다. 어쨌거나 우정 심은 데 우정 났으니 아름다운 우정의 나무라고 해야겠다.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면 더 이상 자녀의 친구를 골라주거나 억지로 붙여줄 수 없게 된다. 학급에 괜찮아 보이는 아이가 있어서 그 아이랑 친하게 지내보면 어떠냐 넌지시 떠보아봤자 소용이 없다. 학급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상황을 우리가 다 관찰하거나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아이들은 자기 취향에 맞는 친구를 골라서 스스로 우정을 가꾸어 나가게 되는 것이다. 학급에서 조별 과제 등으로 친해졌거나 소풍 가서 같은 돗자리에서 밥을 먹었을지는 몰라도, 방과 후 시간이나 주말에 따로 연락해서 만나고자 하는 ‘친구’는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아이가 4학년쯤 되고, 개인의 연락 수단을 갖게 되면 어른을 동반하지 않고도 친구들을 만나러 다닐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모르는 아이들만의 우정의 세계는 점점 확장되고 깊어진다.
오은영 박사님께서, ‘같은 반 아이라고 해서 꼭 친구일 필요는 없다.’는 발언을 하셔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맞는 말이다. 무조건 모두와 친하게 지내기 위해 마음의 상처까지 감내하지 말고, 그 안에서 마음에 맞는 친구를 찾아 우정을 나누면 된다는 뜻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교실 안에서 모둠별로 협동을 해야 하거나, 짝꿍과 간단한 게임을 할 때는 친한 친구가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여도 주어진 과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같은 학급을 구성하는 구성원이라는 일 년가량의 공동체의식은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되는데, 아이에게 "걔 맘에 안 들면 놀지 마!", "선생님한테 조 바꿔달라고 그래!" 하는 식의 요즘 부모들의 대처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듯해서 아쉬운 마음이 든다.
저희 아이 짝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학교 가기 싫다는데
자리 좀 바꿔주세요.
1학년 학부모에게서 꽤 자주 들을 수 있는 위와 같은 요구는 당사자인 두 아이의 성향과 지나간 역사(?)등을 감안하여 한 번쯤은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괜찮은' 친구들을 골라 내 아이주변에 배치하고, '이상한' 아이들과는 같은 반에서 만날 일이 없게 조치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무균 상태에서 길러진 화초처럼 예민한 어른으로 자라나길 바란다면 모를까. 길게 보았을 때 그런 - 마음에 들지 않는 - 아이와도 짝을 할 수 있다는 깨달음과 그 시기를 현명하게 지나가는 요령을 아이가 배워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자.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친구를 만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법을 배우는 것도 넓은 의미의 배움이다. 배우는 과정에서 넘어지고 다쳐 상처를 입는 일도 생길 수 있다.
어쩌면 40분의 수업 시간보다 10분의 쉬는 시간에 배우는 '친구 사귀는 법'이 아이들의 인생에는 더 필요한 마음공부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