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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실

몸과 마음의 치유 장소

by 계쓰홀릭 Dec 2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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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보건실에 자주 가는 아이였나요?


  1학년 아이들은 입학 후 초기 적응기간에 학교를 한 바퀴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운동장에서 자기 교실 오는 것만 겨우 아는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여기는 교무실이에요~ 여기는 행정실이에요~”하고 안내하며 위치와 하는 일을 알려주는 것이다. 전날에는 미리 전체 메시지로 '1학년 아이들이 학교를 둘러볼 예정이니 이해 부탁드려요' 하는 협조를 구하기도 한다. 어떤 교장 선생님은 일부러 그 시간에 교장실에서 기다리시다가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기도 하시는데, 어색하고 불편하신지 미리 도망(?) 가서 교장실을 비워두시는 분도 계셨다.

  행정실이나 교무실은 아이들에게 어쩐지 어렵게 느껴지고 웬만하면 갈 일이 없지만, 보건실은 다르다. 보건실은 대체로 1층이나 2층 정도에 있어서 저학년 아이들과 거리상으로도 가깝고, 앞으로 방문할 일도 꽤 있기 때문이다. 




  1학년 아이들은 정말 작은 상처나 아픔도 쪼르르 달려와서 선생님에게 고한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손가락 - 손가락은 또 어찌나 작은지 - 의 작은 까짐을 눈 앞에 들이대며, "선생님, 저 여기가 아파요." 한다. 그러면 나는 이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내야 한다.

  "어쩌다 다쳤어? 아프겠네. 밴드 붙여줄까? 보건실에 갈래?"

  선생님의 공감에 신이 나서 주말에 캠핑장에서 다친 이야기를 늘어놓고 들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교실에서의 간단한 처치만으로는 안 되겠는지 보건실에 가야 하는 아이들도 있다. 보건실에는 혼자서도 갈 수 있지만, 친구 따라 강남 가고 싶은 아이들이 우르르 손을 들고 나와 따라나서기도 한다. 보건실에는 1명만 따라갈 수 있다는 등의 규칙을 정해두지 않으면, 보건실에 도착했을 때 그들 중 누가 환자인지 몰라 혼선을 빚기도 한다.


  1학년 때에는 별다른 사고가 아니어도, ‘배가 아파요.’, ‘머리가 아파요.’ 하며 보건실에 자주 방문하는 '단골손님'이 많다. 3월 한 달만 지나도, 방문자 목록에 자주 등장하는 이름은 이미 보건선생님이 다 파악하고 계시곤 한다. 수학시간에 유독 머리가 아픈 아이, 체육 시간이면 다리가 아픈 아이, 우유를 먹어야 할 때면 배가 살살 아파오는 아이들은 심리적으로 압박감을 느끼거나 긴장해서 그런 경우가 많다.  따뜻한 보리차 한 잔 마시며, 아침에 뭘 먹고 왔는지 보건 선생님과 담소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증상이 완화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예전 같으면 '엄살'로 치부할 테지만, 요즘은 그런 아이들을 잘 토닥이고 넋두리를 들어주어 마음에 안정을 찾게 한 뒤 교실로 돌려보내는 것도 잘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학교가 무섭다며 등교를 거부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6학년 아이들은 일단 보건실이라는 곳이 물리적으로 꽤 멀어져 있지만, 멀어진 거리 이상으로 '길어진 다리' 덕분에 선생님께 굳이 고하지 않고도 쉬는 시간에 훌쩍 다녀와서 볼 일을 끝내기도 한다. 여학생들은 생리통 등 큰 소리로 알리기 어려운 병명(?)으로 인해 슬쩍 가서 핫팩을 얻어온다. 무리 지어 다니기 좋아하는 여학생들은 친구가 아프다며 우르르 따라나서기도 한다. 한 명만 따라가라고 외쳐도 선생님 눈을 피해 은근슬쩍 따라가 버리는 건, 쉬는 시간인 경우에 말릴 수가 없다.

  남학생들은 체육시간에 크게 넘어지거나 공에 세게 맞았는데, 보건실에 얼른 가보라는 권유에 "괜찮아요. 이번 경기 마저 하고 쉬는 시간에 갈게요."라고 말하고는 정작 쉬는 시간에는 노느라 바빠서 잊어버린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우리 반에는 6학년 남학생 중에서도 덩치가 무척 크고 움직임이 날쌔지 못한 아이가 있다. 몸이 무거워 체육을 싫어하는 그 아이는 유난히 그 시간에 맞춰 다리를 절뚝거리며 보건실에 다녀오곤 한다. 교실은 5층, 보건실은 2층이어서 오며 가며 20분씩 공부시간을 잘도 까먹는다. 이 친구는 학습 능력도 많이 떨어지는데, 영어 시간에 유독 머리가 아프다며 보건실에 자주 온다는 제보를 보건 선생님께서 해주신 적이 있다. 올 때마다 열을 재어보아도 딱히 별다른 증상은 없다. 이 남학생은 보건실의 VIP손님인 셈인데, 1학기 말쯤 보건선생님이 전화를 거셔서는 "명수가 보건실에 오는 시간대가 규칙적이어서 시간표를 살펴보니 유독 영어시간과 체육시간에 많이 오네요. 그 수업 시간을 특별히 기피하는 것 같아요." 하셨다. 체육시간에 절뚝거리던 발목이 쉬는 시간에는 멀쩡하게 나아서 쿵쾅거리고 뛰어다니며 술래잡기를 하기도 해서 명수에 관한 제보는 학생들 입에서도 쏟아져 나온다.

  "선생님, 명수는 아까 멀쩡하게 잘만 뛰어다녔는데 갑자기 절름거리면서 엘리베이터를 타요."

  "선생님, 명수가 아까 보건실에 갔다가 음악실에 늦게 왔는데 엎드려서 아무것도 안 했어요."

  리코더 합주가 어렵고 부담스러워서 머리가 아팠을 명수. 친구들이 엄살이라고 의심하는 듯한 분위기와 눈빛이 속상했을 테지.  나 역시 심증은 가지만, 명수가 아이들에게 자꾸 거짓말쟁이로 찍혀 공공의 적이 되는 것은 막아야 했다.

  "얘들아, 그럴 수도 있지! 진짜로 아팠는데 쉬는 시간에 도파민이 분비되어서 고통을 잊었나 보지. 너도 수학 시간에 괜히 배 아프고 머리 아프고 그럴 때 있잖니?"

  그때 마침, 하교한 줄 알았던 명수가 뒷문을 열고 다시 들어와서 우리는 흉보다가 걸린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나는 의연하게 명수에게 소리쳤다.

  "명수야아~ 아플 거면 확실하게 아프고! 멀쩡할 거면 쭉 멀쩡하란 말이야! 우리 헷갈리게 하지 말고오! 그리고 너 호랑이야? 왜 제 말하면 나타나는거야아~"

  약간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던 아이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명수도 쑥스럽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보건실은 아이들만 이용하는 곳이 아니다. 학생과 교직원 모두 건강에 관한 이슈가 있을 때 찾아가 응급처치를 받거나 상비약을 복용할 수 있다. 나도 가끔 두통약을 받으러 갈 때가 있지만 감히 보건실에 누워 쉬어야겠다는 생각은 잘 하지 못했는데, 교직원 사이에도 보건실 VIP가 있다는 것은 나중에 들어서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어른이 침대에 누워 쉬고 있으면 휴식이 필요한 어린이들이 쉴 곳이 없으니, 보건 선생님 입장에서는 난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학교마다 사정이 다르지만, 여유공간이 많은 학교에서는 교직원 휴게실을 만들면 컨디션이 안 좋은 날 잠시 가서 쉴 수도 있고 좋겠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 휴게실도 늘 가는 사람만 가긴 하겠지만…


  각 학년의 담임선생님들과 보건선생님이 잠시 모여 담소를 나누다가 각 반의 ‘예쁜 아이들’에 대한 자랑이 나왔다. 나도 신이 나서 우리 반에서 가장 의젓하고 근사한  - 아들 삼고 싶은 - 학생 형석이에 대해 자랑하기 시작했는데 이름과 인상착의를 다 듣고도 고개를 갸웃거리는 보건선생님. 누군지 잘 모르겠다고 하셨다. 좀 전에 말한 명수를 비롯한 전교의 보건실 VIP들에 대해서는 나보다 더 자세하게 속사정까지 알고 계셨는데 말이다!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던 다른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보건 선생님은 어찌 보면 각 반에서 제일 훌륭한 아이들은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못 만날 수도 있겠네요."


  보건실을 자주 찾는 아이들은 몸도 마음도 여리고 자주 아파 누군가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다. 가정과 교실에서 그 관심을 충분히 받고, 주어진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느라 바쁜 '교실 VIP'들은 아플 새도 없어 보인다. 생각해 보니 형석이는 체육시간에 다쳤을 때도 보건실에 가는 것을 거절했었다. 이 정도는 다친 것도 아니고, 곧 아프지 않아 졌다는 설명을 하면서 말이다. 그랬던 형석이가 2학기 말에 보건실에 다녀온다고 하더니 다음 시간에도 수업에 오지 않았다. 걱정되는 마음에 보건실에 가보니 늘 건강하던 형석이가 어지럼증을 호소하여, 두통의 원인을 찾기 위해 몇 가지 테스트를 하고 있었다. 열도 없고 별다른 원인도 찾지 못해서 특별한 처치 없이 휴식을 취하다 온 형석이는 조퇴도 하지 않고 하루를 지냈다. 하굣길에 괜찮으냐 물으니 많이 괜찮아졌다고 하면서 집에 갔다. 그날 형석이의 배움 공책 마지막줄 - 그날의 느낀 점을 쓰는 칸 - 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오늘 보건실에 처음 가봤는데 신기하고 어색했다.


  저학년 아이들이 보건실에 사소한 일로 너무 자주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교실마다 작은 응급처치 키트를 두는 곳도 있다. 연고와 면봉, 탈지면과 밴드 한통 정도로 간소하지만 그것만 있어도 보건실에 드나드는 인원을 줄일 수 있어서 규모가 큰 학교일수록 학기 초에 키트를 배부한다. 개인적으로 그 키트가 무척 유용했기 때문에, 6학년을 맡게 된 올해도 서랍 속에 밴드 한 묶음을 갖다 두었다. 우리 집 아이들도 유치하다며 거부하는 캐릭터 밴드 같은 것이다. 준비해 둔 정성이 무색하게, 나에게 와서 밴드 붙일 정도의 작은 상처를 보여주는 6학년은 거의 없었다. 어쩌다 두 명 정도가 있어서 뽀로로 밴드와 헬로카봇 밴드를 붙여주었더니 그게 소문이 났는지 더 이상 나에게 밴드를 붙여달라는 말을 하는 학생은 없다.


  내가 아이를 낳고 키워보니, 아이가 컨디션이 안 좋은 경우에도 학교에 가야 하는 날이 있다. 학교에 가서 수업 시간에라도 컨디션이 안 좋으면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리고 보건실에 가서 쉬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아이는 방과후교실에 갈 때까지도 보건실에 한 번 가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열이 올라 울면서 귀가해서 엄마인 나를 속상하게 했다. 보건실은 너무 자주 가도 탈이지만, 너무 가지 않아도 문제인 것을 깨달았던 순간이다.

  

  간혹 병원에 가야 하는 정도의 증상을 보건실에서 해결하려는 부모님들이 계시다. 주말에 다쳤는데 집에 연고가 없다며 월요일 아침부터 보건실에 오는 아이도 있고, 병원에는 안 가고 보건실에서 감기약을 받아먹으라는 부모님도 있다. 어떤 아이는 화상을 입었는데 매일 아침 보건실에 방문해서 "엄마가 보건실에서 드레싱 받으래요." 한다고도 했다. 보건선생님 입장에서는 난감하고 기분 상하는 일일 수 있겠다. 정말로 급한 사정이 있어서 그랬으려니 하며 이해하고 넘어가기야 하겠지만 말이다.




   몸과 마음이 힘들 때 언제든지 찾아갈 수 있는 보건실. 담임선생님께는 다 털어놓을 수 없었지만 보건선생님과 단 둘이 있으면 속상했던 일이나 고민을 꺼내어볼 수도 있는 보건실은 고충상담소의 역할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보건실은 학교라는 야생의 세계에서 다소 약자로 여겨지는 초식동물 같은 아이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옹달샘과 같은 곳이다.

  옹달샘에서 물을 한모금 먹고 힘을 얻은 아이들이 다시 교실로 돌아와 남은 하루를 건강하고 힘차게 보낼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점차 그 힘을 스스로도 얻을 수 있도록 아이들은 성장하게 될 것이다. 우리 어른들도 예전에는 보건실(양호실)에 가서 위로 받고 힘을 얻어오는 어린이였을 테니 말이다.


*아이들 이름에는 모두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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