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꿈틀거려봐!
"우와 ㅎㅎ 지렁이가 여기까지 들어와요?"
택배 기사님이 지하 계단을 내려오면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게요.. 지렁이들이 미끄럼틀 타는 걸 좋아하는지 자꾸 내려오네요
고무줄은 어디서 타고 내려오는 거지?
이 집에서 살다 보니, 출처를 알 수 없는 생명체와 물품들이 내려오는데 (희귀 벌레, 파인애플 껍질 <왜?>) 이제는 그것들을 기다리는 재미가 있다.
마치 무인도에서 파도에 떠밀려오는 페덱스 택배를 기다리는 주인공처럼
'오늘은 반지하에 어떤 생명체가 떠밀려오려나..'
그렇게 생각하니 이 지렁이들도 참 갑작스럽겠다는 생각이 든다.
빗물에 떠밀려왔는지 지렁이 의지로 내려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반지하 계단 폭을 생각하면 다시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아마 떠밀려왔겠지
나도 갑자기 반지하로 내려와 살게 됐단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우리 여기서 잘 살아보자!
현재 나의 불안의 원천은 무엇일까?
생각이 많을 땐 글로 적어보면서 내 불안의 실제 볼륨을 가늠해 볼 수 있는데,
글로 적은 불안 리스트를 보니,
여태껏 내가 썼던 불안 중에서 가장 실체감 있고 큰 불안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당연한 것이 나는 이제 27살이다(만으로).
슬슬 자리를 잡고 커리어를 탄탄하게 쌓으면서 결혼도 준비하는 사회적인 수순을 스킵하고,
반지하 월세 내는 것도 부담스러운 상황에서 지렁이랑 살고 있으니 불안하고 또 불안할 수밖에 없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운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너 지금까지 뭐 했어?' '너 지금 뭐 해?'라는 질문을 들으면 어깨가 아프고 소화가 안 되는 걸 보면 나도 모르게 계속 위축되고 있었나 보다.
각설하고 내 불안을 이루는 요소는 아래와 같다.
1. 생기를 잃었다
순수함과 열정이 줄어드는 건 응당한 일인데, 생각보다 빨리 주눅 들어버린 내가 안타까워서 불안했다.
그래도 3일은 갈 줄 알았는데 하루 만에 쉬어버린 나물반찬을 보는 느낌.
계속 도전하고, 실패하고, 웃으며 살고 싶은데 현재는 실패만 하고 있어서 말도 안 되게 불안하다
2. 몸이 아프다
공기청정기도 샀고, 환기도 꾸준히 하고, 제습기도 쉴 새 없이 돌리고 있지만 확실히 반지하에 있으니 호흡기가 안 좋아진 것을 느낀다. 기침 횟수가 늘고, 저렴한 매트릭스를 사서 그런가 자고 일어나면 허리가 아프다.
주말엔 한 푼이라도 더 벌어보려고 알바를 하는데 몸 쓰는 알바가 아님에도 몸에 무리가 가는 것 같기도..?
3. 가족들이 보고 싶다
우선 아빠가 너무 보고 싶고, 엄마랑 오빠가 보고 싶다.
혼자서 살아보겠다고 아픈 엄마를 뒤로 하고 서울에 남았는데
원래 서울 사람이었던 엄마랑 오빠는 타지에서 지금 얼마나 힘들까?
두 사람을 보러 가고 싶지만 평일엔 회사 때문에 못 가고, 주말엔 알바 때문에 못 가고
이 핑계 저 핑계로 만남을 미루고 있다.
사실 본다고 달라질 건 없다. 10분 정도 애틋하고 별일 없는 일상 이야기를 주고받는 게 전부이겠지만, 그래도 4인 가족이서 저녁 먹으며 블루투스 스피커로 노래를 듣던 저녁 시간이 너무나도 그립다.
당시 집에서 세탁기가 돌아가며 났던 섬유유연제 냄새,
엄마가 좋아하는 홀그레인 머스터드 소스,
여행 다녀와서 탔는데도 어쩜 이리 하얗냐고 날 보며 웃는 아빠,
처음 듣는 과학 용어를 신나서 설명해 주는 오빠
햇빛 없는 반지하에서 혼자 누워있다 보면 그 시절이 그리워서 한없이 움츠러든다.
난 지금 빗물에 떠내려온 지렁이가 아닐까?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고, 다시 지상으로 올라가려니 계단이 너무나도 높아서 올라갈 수 있을까 싶지만
계속해서 꿈틀거리다 보면 살아남겠지!
기적처럼 착한 인간을 만나, 계단 위로 올려다 줄 수도 있고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믿고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