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다가오니 자연스럽게 한 해를 돌아보게 됩니다. 돌이켜보면 바이러스로 인해 전 세계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기도 합니다만 자연은 또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간 산책길에서 만났던 꽃과 열매들을 다시 보니 느낌이 새롭군요. 지금 마음에 들어오는 사진 몇 장을 어렵게 고르며 그 시간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1월. 이제 보니 한 해의 시작은 겨울이네요. 태초부터 지구는 계속 돌고 있었을 테니까 새순이 돋고 꽃이 피는 계절을 시작으로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지만 메마른 듯한 대지 안에서도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보니 겨울부터 시작해도 좋을 듯합니다.
서리가 내린 대지에는 말라버린 낙엽들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그 사이사이에 개여뀌의 줄기가 솟아있고 아주 작은 씨앗이 몇 알 남아있습니다.
이미 말라버린 가는 줄기에는 역시 갈색으로 변한 유홍초의 씨방이 여전히 달려있습니다. 하지만 저 안에는 단단한 생명의 씨앗이 담겨있겠지요. 모처럼 내리는 눈은 여전히 홀씨를 날리고 있는 박주가리의 열매에도 쌓여갑니다. 하얀 것이 눈인지 박주가리의 솜털인지 구분이 안되는데 그 안에서는 어떤 생명의 움직임도 느껴집니다.
2월. 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보름달이 떠오릅니다. 차가운 겨울밤이지만 달빛이 있어 고즈넉한 느낌이 듭니다.
2월의 눈은 매화나무의 붉은빛 꽃봉오리에도 살포시 내려앉습니다. 눈이 쌓여가며 세상은 온통 하얗게 변했지만 나뭇가지에는 어떤 생명의 움직임들이 느껴집니다. 산수유의 꽃봉오리는 조금씩 벌어지려 하고 목련의 꽃봉오리에는 솜털이 가득하네요. 이제 꽃이 피려나 봅니다. 날씨는 조금씩 따뜻해지고 산수유의 꽃봉오리는 점점 벙그러집니다. 꽃봉오리 안에 가득했던 어떤 에너지가 이제 솟아 나오고 있는 듯합니다.
3월. 삼월이 되니 날씨는 점점 포근해지고 여기저기 꽃봉오리들이 터지기 시작합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산수유의 노란 꽃이네요. 마른 가지에서 화사하게 피어나는 꽃은 어쩌면 산수유의 화려한 부활을 보는 듯합니다. 이제 봄이 온 것이겠죠?
봄밤의 매화에서는 어떤 맑은 향기가 배어 나오는 듯합니다. 매화꽃 아래를 걷는 산책자도 콧노래가 저절로 나오네요. 향긋한 봄밤에 매화와 함께 듣던 노래 '별'을 다시 들어봅니다.
부풀어 오르던 매화의 꽃봉오리가 터지는가 싶더니 하루가 다르게 가지마다 꽃들이 화려하게 피어납니다. 벚꽃, 앵두꽃, 살구꽃, 조팝, 목련, 꽃마리, 냉이, 제비꽃, 개나리꽃.... 이제 세상은 점점 화려해지는군요. 한 겨울 동안에도 꽃봉오리를 키워가던 동백이 드디어 꽃을 피웠습니다. 빨갛게 피어나는 꽃에서는 따뜻함과 함께 뜨거움도 느껴집니다. 하얀 목련이 화사한 햇살을 받으니 더욱 고운 색감을 보여줍니다. 자목련의 꽃봉오리도 금방 피어날 듯하네요. 벚꽃도 여기저기에서 툭툭 소리를 내며 터지는 피어나는군요.
이곳저곳에서 마치 새로운 생명을 찬미라도 하려는 듯 꽃들이 피어납니다. 화려하게 피어나는 봄날을 느끼며, 마스카니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중에서 마을 사람들의 합창인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Gli aranci olezzano)'를 들어봅니다. 대자연뿐만이 아니고 사람들의 마음에도 봄이 온 듯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