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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보면 밥 먹자던 선배… 난 왜 먹어주지 못했을까

그토록 미워했는데, 이제 와 미안한 건 뭘까.

나만 보면 밥 먹자고 했던 선배가 있었다. 멀리서 날 보면 밥 먹자고 뛰어오던 그 사람. 나는 왜 그와 밥을 먹어주지 못했을까.


우리에겐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긴급한 속보를 TV 화면에 자막으로 처리할 때, 나는 이 일을 할 때 아주 예민하다. TV 화면 하단에 띄우는 붉은 바탕 안에 하얀 글씨. 빠르고 정확해야 한다. 정말 긴박할 때는 데스크의 승인을 받지 못한 채 속보를 띄운다.


2021년 어느 날, 속보를 처리하고 있는데 부스럭부스럭… 바스락바스락… 쨍그랑! 쨍쨍쨍쨍…


‘썅~ 이 상황에 도와주진 못할망정 대박이다.’

소리 나는 쪽을 봤다. 냉장고를 뒤지더니 아이스크림 콘을 먹고 있다. 날름거리는 혓바닥이 얄밉다.

‘속보가 터지든 말든 한가한 사람. 출근하자마자 콘을 먹는 건 뭐냐. 냉장고를 없애야 해. 개미핥기도 아니고 핥아먹긴.’


속보 처리가 끝났고 데스크는 나보고 잠시 쉬라고 했다. 그 시절 나는 새벽 3시에 일어나 아침 데일리 생방송을 준비하던 시절이었다. 생방송 마치자마자 긴박한 외신이 전해졌고 신경을 바짝 썼더니 피곤했다. 자리에서 쉬겠다고 하고 엎드렸다.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나를 깨웠다.

“지수 씨, 아침부터 고생했어요. 커피 마셔요.”

아침부터 콘을 핥아먹은 ‘개미핥기’였다.

‘내가 처자는 게 안 보이냐? 처자는 인간은 깨우는 게 아니야. 그냥 두고 가.’

개미핥기는 가지 않았다. 나는 열받아서 일어났다. 자리에 커피가 있다. 뻥을 쳤다.

“저는 커피 원래 안 먹어요.”

“지수 씨 커피 안 마셔요? 몰랐네요. 왜 안 마셔요?”

“원래 안 먹어요.”

“희한하네.”

“제 커피까지 다 드세요.”

“희한하네.”

다시 책상에 엎어졌다.


‘니가 더 희한하다.’

막 잠드려는 순간, 또 말을 걸었다.


“지수 씨, 이건 커피 아니에요. 마셔봐요.”

이번엔 요거트다. 팥빙수같이 크다. 저걸 지금 나 보고 퍼먹으라고? 여기가 대학교 동아리방인 줄 아나. 근무시간이다. 누가 보면 내가 개념 없이 근무시간에 이걸 퍼먹는 줄 알겠다. 얼른 치워버렸다.

그 시절 나는 큰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라 피로했다. 먹는 약의 영향으로 졸렸고 체중도 많이 나가 몸이 무겁고 컨디션이 개판이었다. 그럼에도 첫 에세이 투고 성공을 목표로 미친 듯이 글을 쓸 때였다. 기사 이외의 글쓰기에 자신감이 없어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다른 선후배들은 아프고 예민한 나를 배려해 줬다. 점심 식사도 구내식당을 이용하거나 도시락을 싸 와서 먹는 나를 이해해 줬다. 이 한 사람만 빼고! 개미핥기!

“지수 씨, 점심 언제 돼요?”
“저 점심 안 먹어요.”

“점심을 왜 안 먹어요?”

“원래 안 먹어요.”

“저녁은 먹을 거잖아요.”

“저는 퇴근 시간이 다르잖아요.”

“아 맞다!”

같은 부서에 있은 지가 2년이 다 되어갔는데도 내 근무시간을 모르다니. 난 이래서 그가 싫었다. 이 부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야 하지 않나.


최악의 상사를 만났을 때도 그에게 인간적인 면은 포기했어도 기자로서 배울 수 있는 점이 단 하나라도 있을 거라 여기고 버틴 적이 있었다. 이 개미핥기는 아무리 들여다봐도 보이질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색안경’을 낀 채 그를 바라봤으니.

그는 날 보면 항상 반가워했다. 회사 로비에서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었을 때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개미핥기. 저 멀리 그가 뛰어온다. 얼마나 빨리 뛰어오는지. 어린 시절 골목에서 가지고 놀던 유리구슬 ‘다마’가 생각났다. 다마가 굴러온다. 나는 엘리베이터 쪽을 향해 달렸다. 뒤에서 내 이름이 들린다. 사람들이 나를 쳐다본다.


‘아오, 이 화상아! 누가 보면 내가 너랑 친한 줄 알겠다. 내 이름 그만 불러!’


“지수 씨, 같이 가요. 기다려줘요.”

뒤도 안 돌아보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닫힘 버튼을 눌렀다.

나는 정이 쓸데없이 많다. 이 사람한테는 냉정했다. 나한테 직접적으로 피해 주는 것도 없는 사람인데.

차갑게 대해도 주저함이 없던 개미핥기. 점심 먹자는 거 나한테 계속 까여도 거침없었다.

“점심을 그렇게 안 먹어서 어떡합니까?”

“괜찮아요.”

“잘 먹어야 안 아프죠.”

“네.”

대답하자마자 책상에 엎어졌다. 그래야 그가 사라지니까.

‘점심을 안 먹긴 왜 안 먹냐. 너 없어지면 먹을 거다.’

나는 후배와 함께 구내식당으로 갔다. 이런, 그가 나타났다. 빈자리를 찾는 것 아닌가. 나는 식판을 든 채 탁자 밑에 숨었다. 후배가 깜짝 놀랐다.

“선배! 왜 그래요?”

“개미핥기 갔나 봐 봐. 안 보이면 말해.”

선배가 선배 찾는 거 같아요. 두리번거려요.”
“미친! 나랑 밥을 못 먹어 환장했어.”

“왜 자꾸 밥 먹자고 하는 거예요?”

“몰라. 걸신들렸어. 고개 숙여! 말 걸라.”
“네!”


어느 날, 점심을 안 먹고 엎어져 자고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났다. 눈을 떠보니 포장된 죽 한 사발이 있었다.

‘개미핥기다. 이럴 땐 눈치가 있네. 아픈 거 어떻게 알고. 일할 때 눈치 좀 챙기자. 그러면 나도 당신을 미워하지 않잖아.’

미안하고 염치없었다. 감동받을 거면서.

죽이 꽤 무거웠다. 인사동으로 가야 살 수 있는 거다. 이걸 들고 걸어왔을 텐데. 그 다리로 종종종. 좁은 어깨가 떠오른다. 내 육중한 다리 하나로 밀면 넘어질 것 같은 몸. 무거운 걸 들고 지수 씨를 먹이기 위해 다녀왔구나. 나라는 년은 진짜 왕 싸가지다.

덜 미안하려면 이걸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닥까지 다 긁어먹고 그가 나타나기만 기다렸다. 그가 간식을 잔뜩 들고 나타났다.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선배, 죽 잘 먹었어요. 고맙습니다. 먼 곳까지 다녀오시고 감사해요.”

“지수 씨 잘 챙겨 먹어요. 헤헤.”

그가 어린아이처럼 웃는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그가 다른 부서로 가기 전, 나는 그에게 선배 A와 함께 밥을 사달라고 했다. 그는 영양가 있는 밥이 나오는 곳에서 사줬다.

“지수 씨랑 A 씨랑 같이 밥 먹으니까 좋아요.”

얼마나 해맑던지. 그냥 이 사람은 나랑 밥을 먹고 싶었던 건데, 나는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었는지. 싸가지 없게 굴고.

퇴사한 후 그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난 왜 이리 그를 미워했을까 생각해 봤다.

이유를 말하면 독자분들한테 욕을 먹을 거 같은데, 밝히겠다. 그 당시 나는 열심히 살지 않는 사람들, 특히 조직에서 대충 일하는 사람들을 많이 미워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옹졸했던 내가 지금은 조금이라도 달라졌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들을 싫어했는데, 그런 사람이 나한테 밥을 먹자고 하니까 난감했다.

조직에서는 열심히 일하면 그 사람에게 일이 더 오게 돼 있다. 일 중독자였던 나는 그런 불만은 없었다. 내가 선택한 일의 방식이기에, 일이 더 오더라도 나의 선택이자 책임이라는 사고방식이었다. 그런데 그를 알게 된 후 불만이 생겼다. 그때가 몸이 안 좋았을 때라서 예민했던 것일 수 있다. 예전 같으면 그냥 넘길 일도 몸이 불편하다 보니 짜증 나고 일이 자꾸 나한테 쏠리는 거 같아 화났다. 몸도 마음도 여유 있는 사람이 대강 일하는 게 많이 미웠다.

개미굴 같은 조직을 벗어나 여유가 생기고 건강을 되찾으니 보인다. 내가 얼마나 옹졸하고 유치했는지. 다시 조직에 들어가면 유치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은 없지만, 예전보다는 덜 할 거라 믿는다. 깨달았고 후회했으니까.

반성도 했다. 일하는 면에서는 내가 그보다 열정적이었지만, 후배들을 챙기는 데서는 그의 십 분의 일도 따라가지 못했다. 아프다는 이유로, 자리에 엎어져만 있었다. 후배들에게 정기적으로 신용카드를 주면서 너희들끼리 먹고 오라고 했지만, 가끔이라도 동행했어야 했다.


이제 조금은 넓어진 것 같다. 나와 살아가는 방식이 다른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존중해 주는 마음이.


그들 눈에는, 내가 일밖에 모르는 꽉 막히고 버릇없고 아주 지랄 맞은 년이었을 것이다.



“선배님, 버릇없이 굴어 죄송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챙겨주신 거 잊지 않을게요. 감사했습니다. 건강하세요.”


-(끝)-

https://youtube.com/shorts/YP1ysLw_YxA?si=xIlTEE0wts9WQkNA

https://youtu.be/UVi8oMw9Er0?si=yaMN34yxGgqWQ9D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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