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 키우는 일이나 네 식구의 살림은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시댁을 만났다. 평일 가정에서 많은 일을 하고, 주말에는 시댁에서 일을 하면서도 나는 그저 아무 일도 안 하는 사람이었다. 배려받으며 따듯한 말 한마디를 듣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시부모님의 바뀌지 않을 성격을 백세 시대에 계속 함께 한다는 것은 고통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시부모님께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받은 것이 없어서 나는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만난 지 27년 된 남편과는 아직 정리가 안 된 상태이다. 20대에 느꼈던 사랑의 감정이 아직 있을 리는 없다. 살아온 정, 의리가 남았을 것이다. 물론 자식과의 관계는 영원하다.
우리 형제들은 결혼을 하면서 부모님 댁을 떠났지만, 나는 자식을 그렇게 키우고 싶지는 않다. 부모를 통한 세상 보기만을 하지 말고, 더 넓고 멀리 봤으면 좋겠다. 안정적이었던 성장 과정이었지만, 나는 젊은 날 고생을 포함한 소중한 경험들을 하지 못해서 나약한 내면을 가졌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댔고, 결혼 후에도 변함없이 안정적인 환경에서 생활했다. 내가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보다는 그저 공부를 해서 성취할 수 있는 직업들에 만족도가 있는 정도였다. 뭔가를 대차게 해 나갈 배짱도 없을뿐더러 아예 그런 생각조차 못하는 환경이었다. 그렇다면 내신 1등급을 받은 것처럼 공부로 성공이라도 했다면 내 삶은 달라졌을까? 어떤 직장일이든 기를 쓰고 해내겠다는 태도만 갖추었어도 내 삶은 달라졌을까? 악이든 깡이든 아무것도 없는 나는 그냥 되는대로 사는 사람이었는지 모르겠다.
20년 전 나의 20대 모습은 온실 속의 화초였다. 그런데 내가 아는 요즘 20대 여성도 그런 모습이다. 친구들은 직장 때문에도 자취를 하고, 운전을 하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데 그 20대 여성은 부모님의 보호를 받고 있다. 그야말로 결혼 전에는 자취도 운전도 다 안된다. 그 20대 여성조차 친구들처럼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조차 없다. 심지어는 세미나 등의 출장이 있어서 외박을 해야 하는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 20대 여성은 과연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20대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무슨 말이라도 해주어야 할 것 같은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누군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두 아이를 키우며 느꼈던 행복감의 순간은 빨리 지나갔다.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꾸역꾸역 시댁에 가야 했다. 아이들을 봐주시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시댁이었고, 오히려 일하며 아이들 키우는 며느리와 비교하셨다. 시부모님은 다른 집 며느리들이 잘하는 것만 보셨고, 다른 시부모님이 며느리를 어떻게 대하며 얼마나 배려하는지는 알 필요가 없으셨다. 남편은 부모님 말씀을 잘 들었고, 나도 당연하게 그러길 바랐다. 돌이켜 보니까 결혼 전 남편은 시험에 합격하기까지 부모님께 전적으로 물질적인 도움을 받았다. 내가 용돈을 아껴 쓰라고 잔소리를 해야 할 정도였다. 그의 태도는 부모님께 용돈 받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해 보였다. 그런데 결혼 후 부모님께 잘하는 것 역시 그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당연함의 오류라고 말하고 싶다.
살림이 체질이라고 여기며 결혼 생활을 잘하고 싶었다. 밥솥으로 만드는 베이킹, 수박 잘라서 보관하는 법, 국 끓이는 법, 김치 만드는 법이나 청소 방법까지 살림의 영역을 알아가는 재미도 있었다. 직장생활보다는 집안일이 더 적성에 맞았다.탈진하기 전까지 행복했던 시간은 분명 있다. 하지만 '제발 나를 가만 놔두어라. 아무것도 하기 싫다.'라는 감정은 한동안 나를 지배했다. 침잠의 결론은 나를 책임지며 살겠다였다. 아무리 노후가 보장되는 안정적인 결혼 생활이어도 나는 더 이상 살아있는 내가 아니었고, 아이들도 살아서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르만 헤세는 자신의 기준으로 자녀 교육을 시키는 어머니 밑에서 자라서 그러한 성향 때문에 괴로워했다고 한다. 종교적 신념을 강요하고,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아서 어머니를 피하게 되었다.
돈을 모으고 불리는 일 등 많은 일을 하지만, 시댁 일을 돕지 않으면 아무 일도 안 하는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이 나였다. 인생에 정답은 없기에 나의 선택과 결정, 갈등 해결 또한 정답이 될 수는 없다. 여전히 불확실하고, 알 수 없는 미래의 걱정들이 순간순간 찾아오지만, 오롯이 나를 책임지겠다.
덧) 6월은 텃밭의 상추와 깻잎이 풍년이다. 이웃 텃밭에서 둥근 호박까지 주셨다. 마늘을 포함한 기본양념만 있으면 별다른 재료 없이 밑반찬은 만들어진다. 상추 겉절이, 호박전, 양념깻잎(전자레인지에 1~2분 돌리는 방식)이 뚝딱. 냉장고에 있는 당근이 거들었을 뿐. 양파와 쪽파도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