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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4 - 우리에게 찾아온 새 생명

by 정현태

훌륭한 여인과 결혼도 했고, 널찍한 집으로 이사도 했습니다. 삶의 모든 정황들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길 재촉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아기를 가질 차례였습니다. 아기들만 보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저는 그런 사람과는 거리가 멉니다. 저는 아기들에게서 존재의 신비, 경외, 그리고 아름다움을 느끼지만 먼저 다가가서 어루만지거나 까꿍 하는 식으로 놀아주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저는 책임을 유난히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책임이 주어지면 어떻게 해서든 그 책임을 완수하지만 주어지는 게 아니라면 먼저 나서서 책임을 짊어지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갖는다는 건 먼저 나서서 엄청난 책임을 짊어지겠다는 말도 됩니다. 책임을 싫어하는 제가 아이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영혼의 요구에 가까웠습니다.


Magda는 본인의 삶에서 아기를 상상해 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Magda 또한 저와 마찬가지로 독립적인 성향이 강한 사람입니다. 더군다나 Magda는 막둥이 여동생을 돌본 경험, 그리고 그 여동생이 일찍이 갖게 된 조카를 돌본 경험, 그리고 언니의 쌍둥이 조카를 돌본 경험으로 말미암아 아기를 돌보는 일이 얼마나 고된 일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Magda는 아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저를 위해 생각을 바꿨습니다. 그래도 Magda는 최소한 1년 정도는 단 둘만의 신혼생활을 즐기고 싶다고 했고, 자신의 한국어가 어느 정도 능통해진 뒤에 아기를 갖자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Magda의 제안은 분명히 합리적이었지만 저는 바로 아이를 갖자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Magda는 이번에도 양보했습니다. 뒤늦은 후회지만 제가 너무 성급했고, 또한 일방적이었습니다. Magda의 말에 충분히 귀 기울이고 더 많은 대화를 나누었어야 했습니다. Magda의 꼼꼼한 성격을 고려하면 Magda가 저를 위해 정말 많은 것들을 희생해 왔다는 것을 오늘날 절실히 깨닫습니다. 미안한 마음이 한가득이지만 이 마음을 최대한 덜어내고 대신 감사한 마음을 담아봅니다. Magda가 저를 위해 희생한 만큼 저 또한 평생을 Magda에게 헌신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우리는 아기가 생기기 한참 전에 아기의 이름까지 미리 정해 놓았습니다. 여느 날처럼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른 날이었습니다. 작열하는 태양이 열심히 대지를 덥히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집 주변의 개울가를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Magda가 짓궂은 얼굴로 빙그레 웃으며 아기의 이름을 정했다고 말했습니다. 아직 아기가 생기지도 않았는데 호들갑을 떠는 Magda가 귀여워 보였습니다. 저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계속 이야기해 보라고 했고 Magda는 아기가 딸이면 '하늘’, 아들이면 '태양'으로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솔직히 시대가 조금 지난 이름이긴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각각의 이름을 두어 번 나지막이 발음해 봤습니다. 정하늘... 정하늘... 정태양... 정태양... 하늘이라는 이름에서는 봄날의 싱그러움과 평화가, 태양이라는 이름에서는 한 여름의 열기와 열정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두 번 고민하지 않고 좋다고 답했습니다.


생각보다 아기가 쉽게 생기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조급해하지는 않았습니다. 만약에 임신이 되지 않더라도 그 또한 하나님의 계획으로써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생각이었습니다. 세상 일에는 다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단순한 법이 없고 때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아득히 넘어서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저 모든 일을 감사하게 수용할 뿐입니다. 임신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한 소중한 생명을 입양할 생각이었습니다. 가족이 없어서 세상에 홀로이 던져진 아이의 보호자가 되는 일은 참으로 뜻깊은 일입니다. 입양이 뜻깊은 일이라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없지만 실제로 입양할 생각이 있는 사람을 저는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Magda 또한 저와 똑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몇 달 동안 아기가 생기지 않자 우리는 아기를 갖고자 하는 마음을 조금 내려놓았습니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이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간절히 바랄 땐 결코 응답해주지 않으십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욕망(자아의 이기심)과 순수한 바람(사랑의 충동)을 구분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가 가진 욕망이 순수한 바람으로 바뀌었을 때쯤 아기가 생겼습니다. 어느 날 Magda가 생리 예정일이 한참 지났다고 말했습니다. 임신테스트기 2개를 사 와 바로 확인해 봤고 결과는 모두 양성이었습니다. 임신테스트기의 또렷한 두 줄을 보면 저는 너무 행복해서 방방 뛰거나, 기쁨의 눈물을 흘리거나 둘 중 하나일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처음 느낀 감정을 놀라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 감정은 두려움이었습니다. 도저히 이 현실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Magda의 뱃속에 새로운 생명이 숨 쉬고 있었습니다. 생명의 신비! 여러분은 정자와 난자가 만나 세포 분열을 거쳐 한 사람이 되는 게 믿기십니까? 저는 가끔 이 말도 안 되는 삶의 경이에 소름이 끼칩니다. Magda의 뱃속에 우리가 창조해 낸 아기가 있었습니다. 저는 너무나도 놀랐습니다. 그리고 두려웠습니다. 내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제가 약 10개월 뒤면 한 아이의 아빠가 된다고 합니다. 내가 그럴 자격이 있는 걸까? 내가 핏덩이 같은 아기를 책임지고 잘 돌볼 수 있을까? 저는 너무나도 두려웠습니다. Magda도 저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놀라움과 두려움의 파도 속에서 부둥켜안고는 서로의 등을 토닥였습니다.


며칠 뒤 산부인과에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초음파를 통해 Magda의 뱃속에 작은 생명이 움트고 있음을 두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몇 주 뒤면 아기의 심장소리를 들을 수 있을 거라며 그때 보자고 하셨습니다. 의사 선생님께 건네받은 초음파 사진 속에는 아기집이라고 불리는 까만 점 하나가 하얀 바탕에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아기의 존재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도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아 어리둥절했습니다.


20231124_115921.jpg 병원에서 임신 소식을 확인한 날


심장 소리를 듣는 날이 다가왔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초음파 장비를 Magda의 배에 갔다 댔습니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버튼 몇 개를 누르시더니 이내 심장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아기의 심장 소리는 쏜살같이 질주하며 대지를 두드리는 야생마의 발소리 같았습니다. 엄청난 생명력이 느껴졌습니다. 분명히 저 캄캄한 뱃속 어딘가에서 아기의 심장이 고른 박자로 역동하고 있었습니다. 아기의 심장 소리는 세상 그 어떤 음악보다도 아름다웠습니다. 지금도 눈을 감고 과거를 뒤적거리면 그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는 듯합니다. 의사 선생님은 몇 주 뒤면 성별을 알 수 있을 거라며 또 그때 보자고 하셨습니다. 솔직히 딸이든 아들이든 상관없지만 굳이 고르라면 저는 Magda를 꼭 닮은 딸이 보고 싶었습니다. Magda는 같은 이유로 아들을 바랐습니다.

이맘때쯤 가족들에게 Magda의 임신 소식을 알렸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임신한 부부가 부모님께 서프라이즈로 임신 소식을 알리는 영상을 보신 적이 있나요? 저는 겨울철에 눈이 건조할 때 일부러 이런 영상을 찾아서 보곤 합니다. 그럼 바싹 말라 뻑뻑했던 눈이 금세 촉촉해집니다. 저는 이러한 삶의 감동적인 순간들을 정말 사랑합니다. 저 또한 부모님을 위해 깜짝 파티를 계획했습니다. 먼저, Magda가 부모님을 위해 요리를 해주고 싶어 한다는 이유로 두 분을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식사가 마무리될 때쯤 긁는 복권 두 장을 어머니와 아버지께 각각 한 장씩 건넸습니다. 이 복권은 저희가 인터넷으로 구매한 깜짝 파티용 복권이었습니다. 이 복권을 긁으면 '할아버지(할머니) 당첨'이라고 적힌 메시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두 분께는 회사에서 부모님께 드리라며 준 복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먼저 아버지가 복권을 긁기 시작하셨고 이내 '할아버지 당첨'이라는 글귀를 확인하셨습니다. 눈치가 없는 아버지께서는 '어라, 희한하다. 이상한 문구가 적혀있네.'라고 말씀하시며 이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셨습니다. 어머니도 이어서 복권을 긁으시더니 '할머니 당첨'이라고 적힌 글귀를 확인하셨습니다. 아버지보다는 눈치가 조금 빠른 어머니는 '어머!' 하는 짧은 감탄사와 함께 축하한다며 Magda의 손을 잡으셨습니다. 아버지도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시고는 수줍은 미소와 함께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셨습니다. 예상했던 것만큼 드라마틱한 반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깜짝 파티는 성공이었습니다. 두 분 모두, 특히나 어머니가 손주를 많이 기다리셨는데 자식 된 자로 부모에게 기쁨을 드릴 수 있어 저 또한 행복했습니다.


20231224_143923.jpg 부모님을 위해 깜짝 파티를 준비한 날


몇 주 뒤 다시 산부인과를 방문했을 때 의사 선생님께서 초음파를 보시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공주님이네요.' 그렇습니다. 태양이에게는 안되었지만 하늘이었습니다. 아기는 건강하게 자라고 있었고, 더군다나 제가 바라던 딸이라고 하니 더없이 좋았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다음 일정은 기형아 검사라고 하셨습니다. 기형아 검사라고 해봤자 임산부라면 누구나 받아야 하는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었습니다. 임신 초기의 놀라움과 두려움은 서서히 행복감으로 바뀌어가고 있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발걸음이 가벼웠습니다. 따스한 봄기운이 혹한의 추위를 조금씩 밀어내고 있었습니다. 온 세상이 우리 가족을 축복하는 것 같았습니다. 모든 것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고, 모든 일들이 일어나야 할 시간과 장소에 일어나고 있는 듯했습니다. 이런 완벽한 삶은 소설 속에서나 존재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하늘이가 Magda의 뱃속에 자리를 잡은 그 순간부터 하늘이의 몸에 어떤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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