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는 엄마의 뱃속에서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그 사이 저희 부부는 하늘이의 존재를 긍정하면서도 니프티 검사가 100퍼센트 정확한 것은 아니니 기적을 기대하기도 했습니다. 저희 부부는 평소와 같이 즐겁게 일상을 살다가도 갑자기 슬퍼지거나 예민해지곤 했습니다. 두려웠던 것이지요. 이런 마음이 들 때마다 하늘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만 자신의 자식을 긍정하지 못하는 부모의 마음이란 참 슬픈 것이었습니다.
24주 차쯤 되어서 정밀 초음파를 보기 위해 다시 병원에 들렀습니다. 다운증후군 아이들은 뱃속에서부터 구조적으로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행히도 하늘이는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그래도 혹시 모르니 대학병원에서 다시 한번 정밀 초음파를 받아보라고 하셨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주신 진료 의뢰서를 들고 대학병원에서도 정밀 초음파를 받았습니다. 대학병원 교수님께서는 하늘이에게서 다운증후군의 특징들은 보이나 구조적으로는 아무런 이상 없이 건강하게 잘 크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는 말에 저희는 기뻤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다시 정기검진일이 되어 병원에 들렀습니다. 하늘이는 28주 차에 들어섰고, 정밀 초음파를 보는 날이었습니다. 평소 초음파를 보시며 이런저런 말씀을 많이 해주셨던 담당 선생님께서 이날따라 말씀이 거의 없으셨습니다. 담당 선생님은 초음파 기계를 Magda의 배에 대고 이리저리 문지르시며 바삐 움직이실 뿐이었습니다. 저는 뭐가 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초음파 이미지만 초조하게 보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으니 초음파실의 공기는 점점 더 무거워졌습니다. 참다못한 저는 담당 선생님께 '아기는 건강하게 잘 크고 있나요?'라고 여쭈었고, 돌아오는 대답은 '원장 선생님이 말씀해 주실 겁니다.'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이에게 뭔가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원장실에 들어간 저희는 원장님으로부터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원장님께서는 Magda의 양수가 지나치게 많으며, 하늘이에게는 태아수종의 징후가 보인다고 하셨습니다. 원장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시길, 자신의 병원에서는 더 이상의 진료가 어려우니 대학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상황이 좋지 않으니 마음의 크기가 작아지고, 마음의 크기가 작아지니 원장님의 아무런 의도 없는 말이 날카롭고 비정하게 들렸습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문제 없이 건강하게 잘 크고 있었는데 갑자기 너무나도 많은 것이 변해버렸습니다.
슬픈 소식을 안고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그제야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쏟아내니 슬픔이 아주 조금은 옅어진 듯했습니다. 조금 진정이 되자 저는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이번에는 양수 과다와 태아수종에 대해서 알아볼 차례였습니다. 양수 과다는 말 그대로 임산부의 양수가 과도하게 많은 질환이었습니다. 임신 기간 동안 양수는 너무 많거나 적지 않게 적정 수준으로 유지되어야 했습니다. 양수가 과다하면 임산부의 배가 과도하게 불러 다양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원인을 명확하게 규명할 수 없어 치료법이 마땅히 없었지만 다행히도 아주 치명적인 질환은 아닌 듯했습니다. 진짜 문제는 태아수종이었습니다. 태아수종은 태아의 신체 두 곳 이상에 액체가 비정상적으로 축적되는 질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후가 몹시 좋지 않았습니다. 예후가 좋지 않다는 건 대부분이 해당 질환으로 인해 죽고, 살더라도 큰 장애를 갖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간 꾸역꾸역 잘 지켜오던 마음의 성이 무너진 것은 이맘때쯤이었습니다.
이 시기 정말 수많은 생각들이 왔다가 사라졌다가, 또 왔다가 사라졌다가를 반복했습니다. 부끄럽지만 저는 고백해야 합니다. 이 시기에 제가 가장 걱정한 건 하늘이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가장 많이 걱정한 건 다름 아닌 제 자신이었습니다. 다운증후군 아이를 키우는 것쯤은 그렇게 큰 걱정거리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태아수종으로 인해 하늘이가 더 큰 장애를 앓게 되어 평생을 침상에서 보내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큰 문제였습니다. 그럼 Magda와 내 삶의 자유는? 우리의 이 완벽한 행복은? 장애를 가진 자식을 돌보는 데 내 인생을 바쳐야 하는 것인가? 저는 제 미래에 대한 걱정에 압도되어 하늘이에 대해 생각할 틈도 없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제 자신을 지켜보는 또 다른 '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일관되게 자기중심적이라면 내적갈등도 없었을 겁니다. 또 나른 '나'는 자기중심적인 나를 맹렬하게 비난했습니다. 아파서 생사를 오가는 자식이 있음에도 자기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그럴 수만 있다면 흠씬 두들겨 패고 싶었습니다. 너무나도 자기중심적인 제 자신이 부끄러워 Magda를 쳐다볼 수도 없었습니다. 이 이기적인 자아의 속삭임을 멈추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수록 이기적인 자아의 목소리는 더 커지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세상에서 지은 원죄를 깊이 깨닫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일뿐이었습니다. 저는 이기적인 자아가 고개를 쳐들 때마다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뜻대로 하소서.'
원장님의 제안에 따라 우리는 최대한 빨리 대학병원에 갔습니다. 평일 오후라 그런지 병원은 비교적 한산했습니다. 산부인과에 도착하여 진료를 접수하려고 하는데 안내 데스크를 지키는 한 간호사분께서 예약한 게 아니라면 당장은 진료가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하는 저희를 보고 그 옆에 있던 다른 간호사님이 어떤 일로 왔냐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그 간호사님에게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있는 그대로 설명했습니다. 급한 상황인 것을 인지한 간호사님은 최대한 빠른 시간에 예약을 잡아주셨습니다. 며칠 뒤에 예약한 날이 되어 우리는 다시 대학병원을 찾았습니다. 지난번에 하늘이의 정밀 초음파를 봐주셨던 교수님께서 다시 정밀 초음파를 봐주셨습니다. 초음파를 보시던 교수님께서는 '아이고'라는 탄식을 반복하시면서 한숨을 내리 쉬셨습니다. 태아수종이라는 것이 그렇게 몹쓸 병이었습니다. 과학과 의술이 고도로 발달한 이 시대에도 여전히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몹쓸 병 말입니다. 이유를 모르니 당연히 치료할 수도 없습니다. 교수님께서는 3주 정도 더 지켜보자고 하셨습니다. 저희 부부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보고 3일이나 지났을까요. 학원에서 회의를 하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습니다. 하늘이의 초음파를 봐주신 대학병원 교수님이셨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산모와 아기의 상황이 심각하여 소아과 교수님과도 이야기를 나눴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소아과 교수님의 의견에 따르면, 하늘이가 이대로 엄마 뱃속에 있다가는 더 위험해질 수도 있어서 제왕절개술로 하루라도 더 빨리 하늘이를 꺼내 치료를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교수님께서는 당장 입원 수속을 밟고 내일 아침에라도 수술을 하자고 하셨습니다. 저는 아내에게 물어본 뒤에 다시 연락드리겠다고 말씀드리곤 전화를 끊었습니다.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온 저는 Magda에게 교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Magda라고 별수는 없으니 그렇게 하자고 답했습니다. 저는 교수님께 전화하여 교수님의 말씀을 따르겠다고 했고, 교수님께서는 다시 한번 앞으로의 절차를 간단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전화를 끊고 우리는 입원을 위해 짐을 꾸리기 시작했습니다.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Magda는 입원 기간 동안 하늘이와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꼼꼼하게 챙겼습니다. 역시 야무진 사람입니다. 상황은 급박했으나 우리는 초연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될 것이고, 그 계획에 저희는 어떠한 판단도 더하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그저 순종할 뿐이었습니다. 그저 감사할 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