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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할머니네 탱, 탱, 탱자 따던 날

우리들의 추억 탱자나무 할매

by 별바라기

우리 집 뒤꼍 산비탈엔 언제 심어진지 모르지만 이름 모를 파란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 파란 나무 아래로는 낮시간마다 소가 여물을 되새김 질 하며 쉬는 공간이 있었는데 평상시에도 겁이 많고 특히나 커다란 뿔을 달고 있는 엄마소가 유독 무서웠던 나는 그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 관심도 없던 그 파란 나무에 주황색을 띤 뭔가가 다닥다닥 달린 것이 보였고 왕왕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조심조심 엄마소에게서 최대한 멀찍이 떨어져 파란 나무 근처까지 갔는데 다 왔다 싶었을 무렵 비탈에서 발을 헛디뎌 주르륵 미끄러졌고 가만히 앉아 가을볕을 즐기고 있던 엄마소 앞까지 미끄럼을 타듯 흘러갔다. 나의 미끄러지는 소리에 놀란 엄마소가 벌떡 일어나 뒷걸음질을 쳤는데 그때까지도 땅바닥에 엎드려져 있던 나는 놀람 스텝을 받는 엄마소에게 등을 밟히고 말았다.



나는 품앗이에 가신 부모님을 찾으러 울며 옆집 마당으로 들어섰고 마침 그 시간은 어른들이 오전 일을 끝내고 점심을 막 드시고 있던 중이셨다.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마당에 울며 들어서는 나를 보고 엄마가 놀라 달려오셨고 나는 간신히 소리를 내어 소에게 등을 밟혔다는 말을 하니 보이지도 않았던 아빠는 내 옷을 걷어 등이랑 가슴을 만지며 살펴보시곤 괜찮다고 엉덩이를 두들겨 주셨다. 엄마는 소똥 뭉치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나를 수돗가로 끌고 가 씻겨 주셨고 아까부터 옆에서 기다리고 계시던 옆집 할머니는 가마솥에서 긁어낸 내 얼굴보다 더 큰 누룽지를 뚤뚤 말아 쥐어 주셨는데 아파서 그랬던 것인지 놀라서 그랬던 것인지 울음을 그치지 못한 나였지만 따뜻하고 찐득한 느낌이 나는 누룽지는 계속해서 꼭 쥐고 있었다.



그날 나의 호기심을 발동시킨 그 이름도 모를 파란 나무 열매.

그 범인은 탱자였다. 평상시엔 파랗게만 있으니 관심도 없던 그 나무에 가을이 되면서 노랗게 익어가는 탱자가 나의 눈을 번쩍, 깡깡 산촌에 귤나무가 자랄 리도 없겠지만 그 어릴 적 나는 귤이 달려 있기를 바라는 맘으로 평상시는 얼씬도 안 하던 엄마소 근처에서 보기 좋게 넘어졌다. 할머니 말씀으론 내가 죽지 않은 게 다행이라 하셨는데 엄마소가 나의 등을 밟았을 때 숨이 쉬어지지 않던 그 충격은 내 몸에 각인이 된 것인지 지금도 숨 막히게 생생한데 그래도 감사한 것은 영리한 엄마소가 할머니나 아빠 근처에서 알짱거리며 돌아다녔던 나를 기억해 뿔로 들이받지 않았다는 것과 머리가 아닌 등이 밟힌 것, 그리고 엄마소가 탭댄스를 추지 않아 앞발에 딱 한 번만 밟혔다는 것이었다. 그때 꽤 여러 날 나의 등과 가슴에 찍혔던 보라색 교훈은 점점 더 옅어지다가 연둣빛으로 또 노랑빛으로 변하다가 감쪽 같이 사라졌다.


"애비야 오늘은 밖에다 소를 늦게 매라. 내 아침절에 탱자 좀 따게"


아침을 드시며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할머이 오늘 탱자 딸라고?"


"와 니도 거들래?"


"그라믄 내는 뭐하면 되는데?"


"뭐하긴 사방으로 튀는 탱자 주 주믄 되지. 그라니 아침 마이 무래이"


나는 기운차게 밥을 푹푹 떠서 먹었다.



내가 귤나무였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던 탱자나무엔 억세고 뾰족한 큰 가시가 달려 있어 손으로 따려면 애를 먹었다. 그래서 할머니가 선택하신 방법은 장대로 터는 일이었는데 할머니의 작은 키는 생각보다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아침 쇠죽을 먹고 가을볕에 일광욕을 즐기려 했던 엄마소는 영문도 모른 채 어두컴컴한 외양간에 내내 갇혀 아까부터 "음머~, 음머~" 소리를 내며 애타게 아빠를 부르고 있고 그 찰나 볏단을 가득 실은 아빠의 경운기가 마당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어느새 탱자나무 곁으로 오신 아빠는 할머니 손에서 장대를 거둬 탱자나무 맴매를 시작하셨고 장대가 한 번 씩 움직일 때마다 마치 우박이 내리는 것처럼 노란 공이 하늘에서 후드득 떨어졌는데 등으로 떨어진 탱자는 얼마나 무겁고 딴딴한지 소가 밟은 것처럼 얼얼했다. 나는 잽싸게 뛰어 우산을 들고 엄청 뿌듯해하며 우산 위로 떨어져 멀리멀리 퐁퐁 튀어 굴러가는 탱자들을 보며 웃고 있었다.


"할머이 뭐해?"


"뭐하긴 탱자 씻지"


"근데 왜 수세미로 씻어?"


"야가 때를 뒤집어썼으니 빡빡 씻지. 탱자 기름에 먼지가 붙어 꼬질꼬질하네"


"나도 해 보까?"


"해보고 싶음 해보래이"




딸아이가 열심히 씻은 탱자들

친정아부지를 도와 장작가리를 쌓고 오니 남편과 작은 아이가 탱자 소쿠리를 들고 오고 있었다.


"둘이 탱자 땄어? 오우 많이 땄네"


"장모님이 낮은 가지는 먼저 따셨고 높은데 못 딴 거 털라고 하셔서 이만큼"


"탱자 따는 줄 알았음 나도 따는 건데, 내가 저 나무에 정말 가슴 아픈 사연이 흐흑"


"엄마, 어차피 엄마가 왔어도 엄마 키로는 장대 갖고도 힘들었어. 탱자나무가 엄청 커. 그런데 할머니가 깨끗하게 씻어 달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씻어야 해?"


"표면에 묻은 끈적끈적한 기름이랑 거기에 붙은 먼지 붙은 거 없을 때까지. 꼭지도 따고"


"엄마 근데 탱자가 향긋한 게 향이 엄청 좋아. 그런데 이거 지금 먹을 수 있어?"


"너 그 맛있는걸 아직도 안 먹어 봤어? 엄청 맛있어 한 입 쑥 베서 먹어봐"


"엄마가 먼저 먹어봐. 그럼 내가 먹을게"


내 연기력이 부족했던 탓인지, 아니면 아이가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본 것인지 속지 않았다.


으름 열매

수돗가에서 아이는 열심히 탱자를 씻고 있었고 나와 남편은 축사 구석구석에 무허가 증축된 거미집을 제거하고 있는데 산에 다녀오신 친정아부지가 부르셔서 가보니 작은아이와 함께 으름을 드시고 계셨다.


"엄마 이거 할아버지가 한국 바나나래"


아부지가 건네신 으름을 받아 한입 베어 먹어보니 어릴 적 먹었을 때 보다 더 달다.


"장인어른 맛있는 대요"


사위도 손녀도 딸도 맛있게 먹는 것을 아부지가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계셨다.



엄마가 담궈주신 탱자 효소

엄마가 미리 따서 담아주신 탱자 효소 한 통을 얻어 집으로 돌아왔다. 설탕이 얼마나 녹는지 지켜봐야 할 것 같아 우선 눈에 띄게 두었는데 6개월 정도 숙성을 해서 걸러내고 차로 마시면 혈액순환에도 좋고 비타민 섭취로 감기 예방도 된다고 하신다. 지금껏 탱자 효소는 담근 적도 맛을 본 적도 없어서 상당히 궁금도 하고 기대도 되는데 친정 동네 분들은 탱자로 담금주로 해서 드신다 한다. 과연 어떤 향과 맛이 날까?


내가 태어났을 때도 있었고 지금도 있는 탱자나무 할매. 탱자나무엔 할머니의 추억도 나의 추억도 이제 딸아이의 추억도 얹어졌다. 가시가 덕지덕지 달린 가지와 땡땡한 열매로 새들에게 인기는 빵점이지만 바람이 불 때마다 마당까지 좋은 향기를 보내주는 파란 나무 열매. 몇 알 차 안에 넣어두니 차 안에도 향긋함이 가득 찼다 그래서 나는 친정집을 둘러싸고 심어져 있는 갖가지 과실수보다 탱자나무 할매가 더 정겹다. 탱자나무 할매란 별명도 꽤 맘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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