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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Jun 14. 2023

복숭아 4개를 6,990원 주고 사면 부르주아야?

내가 뭘 들은 거지?

2023. 6. 13.  부르주아 논란의 중심에 선 복숭아

<사진 임자 =글임자 >

"제철 과일을 먹어야지. 우리 그렇게 부르주아 아니야!"

그 사람의 반응에 나는 잠깐 착각했다.

내가 잘못 말했나?

아니면 내가 잘못 들었나?


"아빠, 엄마가 복숭아 사줬어."

퇴근하고 돌아온 제 아빠에게 아들이 내부 고발(?)을 했다.

역시 적은 항상 내 가까이에 있다.

"무슨 복숭아? 복숭아 먹었어?"

그 사람이 아들에게 물었다.

"응. 엄마가 아까 줬어."

자신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발설을 해 버린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열 살 아들은 해맑게 대답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를.

"얼마 주고 샀어?"

그럼 그렇지. 아직은 철 이은 복숭아를 과연 얼마를 주고 샀느냐가 최대 관심사일 것이다.

"4개에 6,990원."

죽을죄를 지은 것도 아니기에 나는 있는 그대로 말했다.

역시나 그 사람은 표정이 확 변하더니 이내 덧붙이는 것이었다.

"지금 복숭아 철도 아니잖아? 제철인 과일을 먹어야지. 우리 그 정도로 부르주아 아니야!"

라고 내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은, 예상이 뻔한 대답이 돌아왔다, 물론.

부르주아라고?

내가 6천9백9십 원을 '6만 9천9백 원'이라고 잘못 말했나?

지금 부르주아라는 단어가 불쑥 튀어나올 만한 상황인가 과연?

순식간에 해석을 다 마쳤다.

지금 복숭아 철이 아니잖아 = 제 철이 아닌 과일은 비싸. = 복숭아를 지금 사기엔 비싸.

제철인 과일을 먹어야지. = 최소한 지금 복숭아를 사는  어리석은 일 따위는 하지 말아야지.

우리 그 정도로 부르주아 아니야. = 당신은 직장생활도 안 하잖아 = 수입도 없잖아. = 우린 이제 외벌이야.

"달랑 복숭아 4개에 6,990원씩이나 주고 샀다고 뭐라고 하는 거야 지금? 내가 맨날 샀어? 사서 나 혼자 몰래 먹기라도 했어? 누가 지금 복숭아철이 아니란 거 몰라? 하나에 6,990원도 아니고 4개에 6,990원 주고 산 게 그렇게 잘못이야? 직장 생활도 안 하는 주제에 한 번에 6,990원씩이나 쓰고 다닌다고 타박하는 거야 지금? 내가 복숭아 사 먹게 돈 달라고 노래 부르기라고 했어? 여기서 부르주아란 말이 왜 나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에서 내가 부르주아가 아니란 비난을 들을 정도로 잘못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복숭아 4개에 6,990원씩이나 주고 사면 부르주안가 보지 요즘은? 당신 말마따나 내가 직장 생활도 안 하고 있으니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 전혀 몰랐네. 그래도 7천 원에서 10원 모자라는 돈을 가지고 부르주아니 어쩌느니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라고는 결코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대꾸할 가치조차 못 느꼈다.

어느 정도는 예상한 반응이었으므로 그렇게 놀랍지도 않았으며 평소의 태도로 미루어 보아

 충격적인 반응도 전혀 아니었으므로.

그렇다고 나를 직장생활도 안 하면서, 흥청망청 마음대로 돈을 펑펑 써 대는, 헤프게 살림하는 여자 보듯 하다니!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한다. 그렇다고 내가 부르주아가 되는 것도, 안 되는 것도 아니고, 결정적으로 난 살림을 결코 헤프게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물론 복숭아가 지금 제철이 아니란 것도 알고 그래서 가격도 결코 저렴하지 않다는 것도 안다.

제철이 한창일 때 사 먹으면 여러 모로 좋다는 거 누가 모르나?

맛도 안 들고 가격만 비싼 제철이 아닌 과일들은 모두 마찬가지다.

지난번에 아들이 좀 앓고 나서 입맛도 잃고 해서 새로운 과일이라도 먹여서 입맛을 돋게 해 볼까 해서 산 것뿐이다.

아들의 입맛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야 난 그 복숭아가 정말 하나에 69,990원이었더라도 샀을 것이다.(물론 편의 월급으로가 아니라, 엄마가 주신 용돈으로. 4개에 6,990원 주고 샀다고 한 소리 듣는 마당에 한 개에 69,990원을 주고 산다면 귀책사유는 내게 있는 '당연한' 이혼감일 테니까.)

평소의 나라면 절대 사지도 않을 거란 걸 그 사람이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결정적으로 별 맛이 없이 민숭맨숭하다.

"엄마가 애들 먹고 싶단 거 다 사주라고 주셨어. 합격이도 전부터 복숭아 타령을 했고 마침 엄마가 아이들 간식이라도 좀 사서 먹이라고 용돈을 주셔서 그걸로 사 준 거야. 애들도 먹어 보면 알겠지, 지금은 맛도 없다는 걸. 그래야 다시 사달라고 안 하지. 이왕이면 맛있을 때 사줘야지.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사 준 줄 알아? 나도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야. 진짜 별 걸 다 간섭하네. 당신 말마따나 고생고생해서 번 당신 월급으로 산 거 아니고 우리 엄마가 애들 생각해서 준 용돈으로 먹인 거야. 알지도 못하면서 왜 말을 그렇게 해?하여튼 밑도끝도 없이 무턱대고 엉뚱한 소리 잘 하는  건 알아줘야 돼.  여전히 내가 일 그만둔 게 불만이지? 걸핏하면 외벌이가 어쩌고, 내가 일을 그만둬서 어쩌고 그러는데. 나도 외벌이인 거 잘 알고 있다고. 누가 뭐래? 당신 돈 갖다 쓴 거 아니니까 걱정 마! 과자도 몇 봉지만 사도 만원이 금방 되는 세상인데 복숭아 그거 달랑 4개 샀다고 그렇게 야단이야? 우리 아들 복숭아라도 먹고 기운 차리라고 사 준 거야. 과자보단 과일이 더 나을 것 같아서 샀다 어쩔래!!!"

라고도 유치하게 되받아 치지도 않았다 당연히.

대신 나는 부르주아의 뜻에 대해 심각하게 곱씹어 보게 되었다.


부르주아 1 ([프랑스어]bourgeois)  


[명사]
1. [사회 일반 ] 중세 유럽의 도시에서, 성직자와 귀족에 대하여 제삼 계급을 형성한 중산 계급의 시민.
2. [사회 일반 ] 근대 사회에서, 자본가 계급에 속하는 사람.
3. ‘부자’(富者)를 속되게 이르는 말.
[유의어] 시민계급, 유산자

<네이버 검색 결과>


그 사람 말처럼 분명히 우린 부르주아는 아니다.

그래, 틀린 말은 안 했네.

그렇지만, 기분 상하게는 말했네.

내가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동안 모르고 있었겠지?

요즘엔 복숭아 4개를 6,990원씩이나 주고 사 먹으면 부르주아에 속하나 보다. 이런 것도 여태 모르고 살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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