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책 읽기 ⑲ - 어쩌다 우리는 환자가 되었나, 피터 콘래드
4장. 더 크게, 더 젊게, 더 빠르게
제약 산업은 1985년 합성 인간성장호르몬을 개발하면서 성장호르몬결핍증에 사용할 수 있다는 FDA의 허가를 받았다. 하지만 "허가외사용"에 대해서도 홍보가 이뤄졌고, 그 대부분은 증강을 위한 것이었다.
현대사회에서 가장 독특한 자기 계발의 하나는 "생의학적 증강"이다. 여기에는 개인의 정신, 신체, 성과를 증진하기 위한 약물적·수술적 개입과 같은 다양한 방법의 의학적 개입이 포함된다. 지방 흡입술, 주름 제거술, 유방 확대술, "코 세우기"를 비롯한 성형수술은 신체의 외형을 개선하는 가장 흔한 생의학적 방법이 되어 가고 있다. ... 피터 크레이머는 "성형 정신약물학"이라는 도발적인 개념을 만들어 냈는데, 그는 프로작 같은 약물이 개인의 삶을 "이보다 더 좋게" 교정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보았다.
아직 개발되진 않았지만, 많은 전문가들이 머지않아 어떤 형태로든 유전학적 증강을 이용할 수 있을 거라 전망한다.
"생명윤리학에서 증강은 건강을 유지하거나 회복하는 데 필요한 정도를 넘어, 인간의 형태나 기능을 향상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일어나는 개입을 특정짓기 위해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용어"이다.
병증이 없는 상태에 대한 생의학적 개입은 "단지" 증강으로 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의학적 필요가 무엇인지는 생각보다 자명하지 않고, 사회와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개입의 맥락을 통해 우리는 어떤 개입이 증강인지 아닌지 여부뿐만 아니라 그것이 용인되는 것인지 불법인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1885년에는 (성장호르몬 치료에서) 심각한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동기에 해부용 시체에서 추출한 호르몬을 투여받은 네 사람이 크로이츠펠트-야콥병으로 사망한 것이다.
제넨테크와 일라이릴리(또 다른 인간성장호르몬 제조사)는 "키 작은 아이들"-더 일반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뇌하수체기능저하증에 따른 왜소증과 특발성 저신장증을 아우르는-을 지원하는 비영리단체인 인간성장재단과 긴밀히 협력하고 있었다.
1)특발성 저신장증
적어도 서구 사회에서 저신장증, 특히 심각한 저신장이 있는 사람은 평가절하되거나 그에 따른 영향을 받게 된다. 특히 남성이 그런데, 이런 현상을 신장차별주의(heightism), 즉 신장이 작은 사람에게 오명이 따라다니는 현상으로 본다. ... 신장이 작은 남성은 미숙하거나 어린애 같다고 여겨진다. "땅꼬마", "반토막" 같은 단어들도 저신장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반영한다.
다른 연구들도 저신장이 아동에게 어떤 주목할 만한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들에 의문을 제기했다.
키가 작아서 심각한 불이익을 겪는다는 증거는 불분명하지만, 키가 클수록 사회적 이득을 누린다는 연구 결과는 있다. 대체로 "키가 클수록 구직 가능성이 커지고, 봉급도 높아진다." 아이린 프리츠와 연구진에 따르면, ... 신장 2.5cm당 연간 약 6백 달러를 더 받는 것으로 추정했다. 고위직인 사람이 하급직인 사람보다 신장이 크다 ... 20세기 미국인들은 대선에서 키가 더 큰 후보에 투표했다. 텔레비전 시대가 개막한 1952년 이래 키가 더 작은 후보가 이긴 적은 2004년을 포함해 불과 세 번밖에 없었다.
키 작은 남성은 키 큰 남성에 비해 덜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자료도 있다. 이처럼 사람들이 외모를 토대로 개인의 능력을 판단한다는 가정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 대체로 "성인 대상 연구는 신장과 사회적·경제적 성공 사이에 연관성이 있을 수 있음을 나타낸다."
부모들은 일반적으로 아이들이 누릴 수 있는 삶의 기회가 증진되기를 원한다. 그렇기에 아이들이 남들보다 유리한 입장에 있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특발성 저신장 아동에게 인간성장호르몬을 투여해 키를 늘리려는 것이다. ... 그러나 특발성 저신장증 아동에 대한 인간성장호르몬 치료 연구는 결과가 분명치 않다. 대체로 특발성 저신장증 아동의 치료는 단기간에 효과를 보이지만, 치료가 끝난 성인기의 최종 신장을 연구해 보면 예측 신장과 별 차이 없음이 드러난다.
2003년 7월, FDA는 일라이릴리의 인간성장호르몬인 휴마트로프를 저신장 하위 1, 2%에 해당하는 특발성 저신장증 아동에게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 ... 이 결정은 저신장에 대해 의학이 관할하는 영역을 크게 확장했으며, 생의학적 증강의 가능성도 확대했다.
키가 작은 것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 부모들은 아이들의 치료를 바라지 않았고, 아이들 역시 자신의 키에 대해 훨씬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요약해 보면, 우리 사회에는 작은 키에 대한 편견이 있다. ... 하지만 이런 증강이 개인의 사회적·심리적 기능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지는 불분명하다. 한 의사는 "성장호르몬을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저신장은 질병이 되었다."라고 이야기했다.
2)항노화 요법
인간성장호르몬은 노화 진행을 방지하거나 되돌릴 수 있는 증강제로 널리 환영받았다.
노년기에 성장호르몬 분비가 적어지거나 사라짐에 따라, 근육량이 줄어들면서 지방 조직이 늘어난다는 주장이었다. 이들은 사라진 성장호르몬을 보충해 신체 성분을 재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성장호르몬은 미디어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 일부 사람들은 성장호르몬을 "젊음의 샘"에 비유했고, 일부 기자들은 성장호르몬요법이 "노화를 효과적으로 역전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효과가 미미하고 위험성이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이나 각종 항노화 클리닉을 통한 인간성장호르몬의 유통은 거대한 산업이 되고 있다.
3)경기력 향상
경기력 향상 약물 사용엔 오랜 역사가 있다.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 선수들은 경기력 향상을 위해 약초나 버섯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19세기 프랑스 운동선수들은 ... 코카 잎과 포도주를 섞은 뱅 마리아니를 즐겨 마셨다. 1950년대 초반에는 운동선수들의 보조제로 스테로이드가 널리 쓰였는데, 특히 순발력이나 근력이 필요한 선수들이 선호했다.
"상위 백 명의 운동선수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복용하면 올림픽 금메달을 얻을 수 있지만 일 년밖에 살지 못하는 약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냐는 질문에, 절반이 넘는 선수들이 복용하겠다고 답했다.
처음 인간성장호르몬이 출시됐을 때 스포츠계는 흥분의 도가니였다. ... 매체들은 경기력 향상을 위해 인간성장호르몬을 사용한 것으로 의심되는 사례들을 보도했다. ... 과연 성장호르몬 투여를 도핑테스트를 통해 효과적으로 발견해 낼 수 있느냐는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성장호르몬 도핑테스트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서 처음 도입되었다.
생의학적 증강의 양상
의학적 정의는 변화한다. 즉 새로운 의학적 진단이 개발되어 특정 형태의 증강을 치료로 정당화할 수도 있다.
증강은 신체나 성과를 과거에는 다다를 수 없는 수준까지 끌어올려 주는 개입이다.
1)정상화
의사나 환자가 "정상" 혹은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수준까지 신체를 개선하려는 목적으로 생의학적으로 증강이 사용될 때의 증강을 "정상화"로 부를 수 있다. 다른 용어로는 "표준화"로 부를 수 있겠다.
2)보수
젊음을 되찾거나 현재의 몸을 과거의 상태로 되돌리려는 목적으로 생의학적 개입이 일어나는 경우도 많다. 노화를 늦추기 위해 인간성장호르몬을 사용하는 것 ... 많은 종류의 성형수술이 이런 형태의 증강을 대표한다.
이런 증강은 "내면과 외면 사이의 괴리를 보수"하는 시도로 여겨질 수도 있다. 성형수술을 받은 많은 이들이 수술을 통해 자신의 몸이 자신이 생각하는 정체성과 일치하게 됐다고 말한다.
3)성과향상
최근 생의학적 개입은 경기력 향상을 다양한 방법에도 사용되고 있다.
대부분의 증강 사례에서 중요한 것은 맥락이다.... 알츠하이머병 치료를 위해 인지기능 개선약을 복용하는 것은 치료지만, "건망증" 치료를 위해 복용하는 것은 보수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또 수능 시험을 치르기 전에 복용하는 것은 용인 가능한 증강으로 간주되지만, 체스 경기 이전에 복용하는 것은 경쟁을 불공정하게 만드는 불법이 된다.
생의학적 증강의 유혹
인간이 보다 관능적인 몸, 영원한 젊음, 운동경기에서의 승리를 추구해 온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다. 이는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미국 문화에 깊이 뿌리내린 목표들이며, 크고 빠르고 많은 것을 가치 있게 여기는 문화에서는 별난 일이 아니다. ... 인간의 몸을 더 나은 모습으로 만들고자 하는 문화적 목표는 변하지 않았다.
이런 맥락에서 생의학적 증강의 유혹은 현재 자신의 상황을 바꾸고 싶은 개인과 집단에게 좋은 유인이 된다. ... 생의학적 증강은 두 가지 유혹을 품고 있다. 목표 그 자체(예를 들어, 더 큰 키, 더 젊어 보이는 외모, 더 나은 경기력)가 유혹적이기도 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생의학적 방법(예를 들어, 단기간에 가능하다는 점, 새로운 기술적 방법, 의학적 해법)도 유혹적이다.
증강은 사회적 유혹인데, 이는 그것이 없었더라면 비슷했을 개인들 사이에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증강은 개인이 우위를 점할 수 있게 해주고, 사회는 우위를 점한 개인에게 보상을 준다. 하지만 증강 개념에서 핵심은, 일부의 사람만이 증강될 수 있다는 점이다. 만약 이런 특성이 보편화된다면 경쟁력은 사라질 것이다.
매우 성공적인 증강은 그 자체로 시장을 형성하고 이내 실질적인 필수품이 된다.
에릭 젱스트는 "아픈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 시도되는 모든 개입은 건강한 사람들을 위한 증강으로 포장될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프로작은 처음에는 임상적 우울증 치료에 도입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을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식으로 요란하게 선전되었다.
1)생의학적 증강은 부자연스러운가?
칼뱅주의에 기반을 둔 우리 문화에서 우리는 구원받기 합당한 사람임을 보여 주기 위해 노동에 힘써야 했다. 그러나 생의학적 증강에는 근면한 노동이 포함되지 않는다. ... 현대사회는 약물복용에 대한 일종의 "약학적 칼뱅주의"를 적용한다. 즉 쾌락, 성적 만족, 정신적 안정, 신체적 건강 같은 목표들을 약물보다는 자연적인 방법으로 달성하는 것이 낫다고 보는 관점이다. ... 무엇이 자연스러운 것인지에 대한 결정은 사회적 정의에 달려 있다.
2)공정성의 문제일까?
생의학적 증강에 나타나는 가장 근본적인 공정성 문제는 모두에게 제공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이런 제약에 따라 증강은 많은 경우 엘리트주의로 이어진다. 증강의 사용은 대체로 사회 내에 자원이 어떻게 배분되고 있는지를 반영한다. 더 많은 자원을 가진 사람들은 생의학적 개입에 대한 접근성이 높거나 그에 따른 비용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의학적 증강의 비가시성은 공정성을 가장 위협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 누군가는 상대방이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신체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 같은 정보의 부족은 신체 능력이 증강된 선수에게 경쟁자들이 알 수 없는 이점을 제공한다.
3)위험성과 성과의 문제
작곡가 로베르트 수만은 손가락을 늘려 주는 기계장치를 사용해 더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되려다가 결국 오른손 중지에 영구 마비가 왔다. ... 유방 보형물은 암 발병 위험을 높이고 파열될 위험이 있다. 스테로이드제 사용에 따른 테스토스테론 분비 중단은 췌장암과 심장병 발병의 위험을 높인다. 인간성장호르몬 사용은 고혈압, 당뇨, 심장병의 위험이 있다.
증강은 개인에게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될 수 있도록 하는데(예를 들어, 제 나이보다 어려보이게 하는 등), 이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에 위협을 가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증강은 발각될 위험을 안고 있다. ... 스테로이드를 사용하는 선수, 유방 확대술 ... 주름 제거술과 모발 이식술을 받은 남성 모두 폭로의 공포 속에 살아간다.
4)사회적 의미의 변화
어떤 당면한 상태나 문제에 대한 정의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생의학적 접근은 개인(의 외모나 경기력)을 어떤 정해진 기준점 이상으로 증강하는 방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생의학적 증강은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것이다. 즉, 생의학적 증강은 좀 더 집단적인 방식을 통해 사회적 기준이나 기대를 조정하기보다는 개인들을 변화시킨다.
생의학적 증강의 사용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특정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대다수의 사람이 증강을 사용한다면, 증강 자체가 사회적 다양성을 줄이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나은 게 항상 좋은 걸까요?
호르몬 결핍이 없는 아동의 키를 더 크게 할 수 있다는 과학적 근거는 모호하지만, 약간의 추가 성장은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인간성장호르몬의 항노화 효과는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경기력 향상에 도움을 준다는 확실한 연구 결과도 없다.
윤리적·법적 한계 내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고를 추구하는 것이 잘못인가? 반면 최고가 항상 좋은 것이라는 문화적 전제에 의문을 던져 볼 필요도 있다. ... 위험성이나 공정성, 평등, 진실성, 그리고 개인의 선택 등과 같은 문제들이 불가피하게 제기될 수밖에 없다.
생의학적 증강은 자기 계발에 대한 문화적 맹신, 경쟁에서 앞서고 싶은 개인의 욕망, 인간적 문제를 의학적으로 해결하는 것에 대한 믿음, 그리고 생명공학 산업의 경제적 충동과 시장 조성 활동 등등이 서로 교차하는 곳에서 나타난다. ... 우리는 생의학적 증강이 가져올 사회적·문화적 영향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앞으로 더 큰 유혹이 닥쳐올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5장. 질병에서 지향으로
탈의료화는 어떤 문제가 더는 의학 용어로 정의되지 않고 의료인의 개입이 적절치 않게 되었다고 여겨질 때 일어난다. ... 자위행위는 킨제이가 남성의 90% 이상이 자위행위를 한다는 사실을 밝혀냈을 때에야 통계적으로 정상에 속하는 행위가 되었고 ...
남성 동성애에 대한 의학적 개념의 등장
"동성애"라는 단어는 1869년 헝가리 의사인 카를 벤케스트가 처음 사용했다. 프러시안 법전의 억압적이고 가혹한 처벌에 반대하기 위해서였는데, 그는 동성애가 후천적이라기보다는 선천적인 것이어서 그런 처사가 부당할 뿐만 아니라 효과도 없다고 주장했다. ... 이처럼 처음 동성애의 의료화 과정에는 강압적인 법적 제재로부터의 보호라는 의미가 있었다.
결정적으로 동성애는 미국정신의학회가 공식적으로 발간하는 정신 질환 범주 편람인 DSM과 그 원조 격인 세계보건기구의 국제질병분류에 포함되면서 의료화되었다.
미국정신의학회 산하 분류위원회 ... 는 활동가들의 의견을 수용해 동성애 자체로는 진단 기준이 되거나 질병이 될 수 없다며 DSM을 개정했다. 다만 자신의 성적 지향으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은 질병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 이로써 기존의 동성애라는 의료화된 정의 대신 "성지향성방해"라는 새로운 진단명이 생겼다. 동성애는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탈의료화 되었고, 더는 질병으로 간주되지 않게 되었다.
탈의료화의 네가지 쟁점들
1)정신의학의 변화
첫째, 생의학적 정신의학이 주류를 이루면서 정신분석학적 접근을 대체했다. 이에 따라 DSM의 수정에 관한 결정들은 이론적 의제보다는 과학적 근거에 기반을 두는 경우가 많아졌다. 둘째, 동성애자 권리 운동과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LGBT) 단체들의 등장은 미국정신의학회를 비롯한 정신의학·심리학·사회사업 분야에 동성애 옹호 단체들이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진단명은 여러 번 변화를 거듭했고, 그 결과 DSM-Ⅲ에는 "자아-이질적 동성애"라는 용어가 새롭게 등장했다. 이 같은 "타협적" 진단명으로 인해 강조점이 자신의 성적 지향에 대한 갈등에서, 이성애 관계에서 성적 흥분을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옮겨 갔다.
1987년, 마침내 DSM-Ⅲ-R에서 자아-이질적 동성애가 삭제되었다. 이로써 의료화된 동성애의 마지막 흔적은 정신의학의 공식 편람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DSM-Ⅳ-TR에 따른 성정체감장애를 겪는 아동의 진단 기준은 다음과 같다.
반복적으로 반대 성에 대한 강한 성적 동일시를 드러내고, 반대 성이 되기를 소망한다. (기준 A) 반대 성에 대한 성적 동일시는 단순히 문화적 이익을 취하려는 욕구에 기반을 두지 않아야 한다. 또한 자신에게 부여된 성과 성역할에 대한 끝없는 부적절감을 느낀다.(기준 B) ...
2)HIV / AIDS의 등장
게이 남성의 에이즈 감염률과 사망률이 다른 인구 집단보다 훨씬 높았기 때문에, 게이 공동체는 에이즈 운동과 연구의 중심이 되어 갔다.
일부 사회학자들은 에이즈가 동성애를 재의료화했다고 주장한다.
에이즈에 대한 최초의 개념화와 의학적 명명은 "게이 관련 면역장애"였다. 초기 의학 논문들은 에이즈에 걸린 환자들 모두가 게이였기 때문에, 이들의 생활 방식이나 성 행동이 발병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같은 시기에 이성애자 인구 집단에서 나타난 에이즈 발병은 무시되기 일쑤였다.
이 같은 프레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지만, 많은 사람에게 "동성애적 생활 방식"과 질병이 연관되어 있다는 생각을 심어 주었다.
에이즈는 게이의 행동에 대한 의학적 감시를 늘렸고 동성애에 대한 오명을 조장했지만, 동성애를 의료화하지는 않았다. ... 활동가들은 기성 의료계의 "내부자"가 되어, 에이즈에 걸린 게이 환자에 대한 의학적 방임을 예방하고, 동시에 치료 과정이 공공연한 권리 침해로 이어지지 않게 했다. ... 궁극적으로 에이즈 운동은 의사와 에이즈 환자 사이에 더욱 협력적인 관계를 구축하게 만들었다. 이런 협력 관계 덕분에 동성애자에 우호적인(즉, 성적 자유를 보장하는) 안전한 성관계 지침이 마련될 수 있었으며, 게이 공동체 역시 의료인에게 동성애자의 성 행동에 대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었다.
3)유전학과 동성애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193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동성애의 유전적 기원에 관한 연구는 거의 없었다.
1990년대에는 인간게놈프로젝트의 영향 아래에서, 동성애와 유전자 사이의 연관성을 살피는 연구가 갑자기 늘었다.
동성애의 유전성에 관한 가장 유명하고, 과학적으로 가장 정교한 연구는 1993년 7월 16일 [사이언스]에 발표된 딘 해머 등의 연구다. 이 논문은 X염색체에서 Xq28이라는 동성애 유전자를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 그러나 그가 발견한 것은 유전자가 아닌 유전자 표지일 뿐이었고, 연구는 재현되지 않았다.
"게이 유전자"는 과학적으로 불명확한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에는 널리 받아들여졌다.
4)게이 공동체와 "성적 지향"에 대한 인식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사이, 게이 해방 운동은 섹슈얼리티에 대한 생물학적 이론들을 공공연히 비판했다. 레즈비언-페미니스트나 게이 활동가들의 글은 섹슈얼리티가 생물학적으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1980년대, 게이 공동체는 동성애를 "지향"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성적 지향"이라는 용어는 동성애가 선택이 아니라 개인의 성격을 구성하는 불변의 요소임을 나타낸다.
테밀리오는 "가장 강경하게 동성애를 반대하는 이들을 제외한다면,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성적 정체성과 관련해 '게이로 태어난다'라는 관점을 받아들이게 되었다"라고 주장했다.
상당수의 게이와 레즈비언이 개인적인 이유로 동성애의 생물학적 발생론을 지지했다. 어떤 이들에게, 사회로부터 억압과 배척을 받는 동성애자가 되기를 스스로 선택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탈의료화 이후
동성애가 유전적 영향아래 놓이는 것에 대한 활동가들의 반응은 뒤섞여 있었다. 일부는 동성애 유전자 가설을 동성애가 자연적으로 발생한다는 근거로 보았으며, 따라서 동성애 치료가 가능하다는 주장의 반론으로 보았다. 또 다른 이들은 유전적 치료, 재의료화, 심지어는 잠재적 동성애자인 태아에 대한 대량 학살로 이어지는 첫걸음이 아닐까 우려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의료화에서 중요한 것은 유전적 발견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해석되느냐 하는 점이다. 예를 들어, "게이 유전자"의 발견에 대한 양측의 주장은 모두 탈의료화를 유지하거나 재의료화를 초래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되는 지점들이다. 즉 과학적 증거가 해답을 제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