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목항에서 천리포까지는 하염이 없는 길이었다.
잰걸음이라면 반나절이면 갔겠으나 고 씨 일가는 속절없는 걸음을 걷고 또 걸었다. 아무도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고 끼니가 지나도 뭘 먹자는 사람도 없었다.
외가집으로 가는 줄 알았는데 모친은 외가가 있는 바다를 한참 지나서 산길을 올랐다. 어린것들을 데리고 올라도 힘들지 않을 만큼 낮은 산이었다.
용옥은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삼촌의 일을 전할 생각에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던 것이다. 열두 살짜리가 다 자기 잘못인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외가 식구를 볼 자신이 없던 참이었다.
도중에 모친이 술이아재네로 간다고 했는데 도착해 보니 술이아재라는 사람은 없고 모르는 두 가족이 두 개뿐인 방을 하나씩 차지하고 있었다.
용옥의 모친은 다짜고짜로 짐을 풀고 용옥 남매를 아무 방으로나 밀어 넣었다. 모두 전란을 피해 온 난민이라고 했다. 그러나 생면부지는 아니고 다들 동리 사람의 일가친척들이었다.
그렇게 세 가족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아이들만 아홉이었다. 용옥의 언니인 용주가 제일 맏이고 다음이 용옥이었다. 그리고 밑으로는 고만고만했다. 아이들은 동리에서 누구네 집 친척이 제일 높은가를 따져 번갈아 가며 상전 노릇을 하고 놀았다.
모친은 혼자 몇 번 외가에 다녀온 눈치였으나 외가 식구 누구도 고 씨 일가를 보러 오지 않았다.
그러나 외진 바닷가 마을이라고 전란이 피해가지는 못했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동리의 남자 어른들이 사라지고 없었다. 용옥의 부친도 사라졌다.
남자들은 해가 뜨기 전에 나가서 하루 종일 숨어있다가 밤에 따로따로 돌아와 밥을 먹고 갔다.
분명히 밥 짓는 냄새는 못 맡았는데, 언제 지었는지 새벽이 되면 집 뒤로 돌아 앉은 헛간으로 밥상이 들어갔다.
용옥이 깬 척을 하면 언니 용주 언니가 한 손으로는 용옥의 귀를 잡아 당기고 다른 손으로는 입을 막아 소리를 못 내게 했다. 그러면 용옥은 뭔지 모를 두려움으로 한동안 귀를 잡힌 채 숨을 죽이고 자는 체를 했다.
아이들은 용옥을 일러쟁이라고 불렀다.
억울할 것도 없는 것이 용옥은 실제로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다 일러바쳤다.
아이들이 몰라도 그렇게 모를 수기 없었다.
엄마들이 아이들을 모아 놓고 아버지 얘기를 절대로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건만 이 애들은 노상 아버지 얘기를 꺼내 위험을 자초했다.
모를 나이들도 아니었다. 남 다 겪은 전쟁을 이 애들만 안 겪었을 리 없건마는 아버지들이 잡혀간다는 데도 그랬다.
"밤에 아부지 돌아오면 다 일러준다."
"너 잘 때 왔다가 해뜨기 전에 숨는 걸 잠 안 자고 아버지 기다리나?"
이러기도 하고,
"아버지는 새벽에 밥을 먹는다."
"그래그래. 미역죽을 안 먹고 밥을 먹는다. 아버지만 맨날 밥을 먹는다."
이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용옥은 가차없이 엄마들에게 고자질을 했다. 그러면 아이들은 부지깽이로 자국이 나도록 맞았다.
한 번은 말도 말도 지겹게 안 듣는 아이 하나가 애들을 모아놓고,
"아부지들이 어디 숨는지 아나? 내가 몰래 봤는데 산이 아니라 바다로 가더라."
라고 하는 걸 붙들어 그 애 엄마 앞으로 끌어다 놨다.
아이는 부지깽이로 맞으며 폴짝폴짝 뛰었고 아이의 엄마는 아이보다 큰 소리로 엉엉 울었다. 엄마된 체면이고 뭐고 주저앉아서 가슴도 뜯고 발도 비볐다.
그러고도 정신을 못 차린 아이가 꺼떡하면 아버지 일로 협박을 하려 들었다. 제 뜻대로 안 되는 일이 있으면,
"나 아버지한테로 간다? 간다?"
하고 가는 시늉을 하며 겁을 줬다. 일부러 그러는 거였다. 밤말은 쥐가 듣는 시절인데 제 아버지의 목숨이 걸렸다는데도 철이 없어도 그렇게 없을 수가 없었다. 나이도 열 살이나 먹은 아이였다.
그러다가 진짜로 완장을 찬 사람들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엄마들은 연판장에 가고 용옥과 아이들은 방에 배를 깔고 글쓰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방문이 벌컥 열리며 청년 몇이 신을 신은 채로 들어왔다. 어깨에는 총을 메고 있었다.
용주언니는 엄마들과 함께 나가고 용옥이 제일 어른이었다. 아이들이 방구석으로 몰렸다.
한 청년이 용옥에게 딱따거리며 물었다.
"니들 아버지들은 어디 갔나."
용옥은 순간 말 안 듣는 아이의 얼굴 먼저 봤다. 그때만큼은 청년들보다 그 애가 더 무서웠다. 무슨 말이라도 떠들까 봐 손발이 덜덜 떨렸다.
슬쩍 본 아이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투명해질 지경이었다. 얼이 빠진 것 같던 아이가 갑자기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아부지 없어요, 아부지 죽었어요, 아부지 없어요, 아부지는 접때 죽었어요."
청년들은 집안을 뒤지다 돌아가고 연판장에 갔던 엄마들이 사색이 되어 왔다.
오들오들 떨며 방안에 뭉쳐있던 아이들은 와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들도 아이들을 안고 떨며 울었다. 용주 언니가 귓속말로 연판장에서 마을 어르신 몇이 총에 죽는 것을 보고 오는 길이라고 알려 주었다. 적군에게 협조했다는 죄목이었지만 협조하고 싶어도 못했을 꼬부랑 노인들이었다고 했다. 설마 노인을 어쩌겠는가 하는 심사로 숨지않은 어르신들이었다. 젊은 목숨 대신이었다.
그 때 쯤에는 아버지들을 죽이겠다고 첮아다니는 사람들이 빨갱이인지 우리 편인지 아무도 아이들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적군이 누구인지도 몰랐다.
말도 말도 지겹게 안 듣던 아이는 아버지 얘기를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않게 됐고, 그날 이후 아버지들은 밤이 돼도 집으로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