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빛의 여정 44화

장편소설 빛의 여정 44화 / 5장 전투 수도원

by 포텐조

장편소설 빛의 여정 44화 / 5장 전투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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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데라께서 말씀하시었다. 말로트 그 자는 살아있는 절망이요, 세계의 절망이니 천계의 자리를 내게서 빼앗었으니 온 세계를 늪으로 빠뜨릴 것이다. 보라, 이제 그의 권능은 하늘이요 나의 권능은 땅 속이니 하늘에서 부정한 것들이 쏟아져 내려 올 것이다." - 피데라시스 경전 "선지자의 증언"중 발췌


야심한 밤, 핏빛 늑대는 숨이 멈춘 지 얼마 안된 온기의 시체를 뜯어 먹고 있었다. 사정없이 물어 뜯으며 피를 튀기는 이 잔인한 야수는 본디 고독한 존재로 알려져 있다. 게걸스럽게 먹어치워지는 시체는 이제 온데간데 형체를 알기 힘들었고 주변에는 피가 튀겨 땅을 적셨다. 괴물이 눈을 번뜩이며 공허의 밤을 노려보았다. 미간은 지독할 정도로 구겨진 채 그 야성을 한 눈에 알게 하였고 불과 몇 분 전에 살아있던 이로 하여금 공포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사냥감을 해치운 핏빛 늑대가 마침내 제 다리를 움직여 다른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동토의 얼어죽은 풀숲에 진눈깨비들이 이리저리 거세게 튈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달렸다.


괴물은 저 멀리로 시선을 고정한 채 계속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달이 기운 밤, 어둠 속 한 가운데 인적 드문 동굴에 도착했다. 동굴은 해골들로 가득했고 괴물이 밟는 족족 오래된 뼈들이 으스러졌다. 안 쪽으로 들어 갈 수록 좁아지는 입구임에도 핏빛 늑대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재빠르게 통과했다. 마침내 도달 한 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손에 괴물은 자신의 머리를 가져다 대었다.

"옳지, 잘했다."

몇 차례 쓰다듬던 손을 자연스럽게 거두어 들였다. 절망의 추종자가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칼날에는 피가 마를 틈이 없었고 살육의 잔치를 벌이는 족족 사내 앞에 위치한 제단에선 절망에게 승전보를 알렸다. 그의 옷은 피로 범벅이고 낡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앞에는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옷장과 거울이 놓여져 있었다.


티쿠아린이여. 이제 서서히 영원한 추위가 대륙 곳곳을 빈틈없이 채우려 하고 있었다. 또한 혹한으로 무르익으니 동식물은 추위에 움츠러 들거나 저주에 의해 죽어갔다. 반면 티쿠아린 대륙을 움직이려는 자들에겐 그 누구보다도 바쁘게 움직일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갈수록 이그네움은 고갈 되어 가고 있었지만 불을 찾는 사람들은 무수히 많아지고 있었다. 아보테에 하루에도 수백 수천의 서신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그네움 요청 서신은 이그네움으로 붙여진 불에게 한꺼번에 불태워졌다. 전령 그것도 모자라면 각 지역의 우두머리들이 찾아와서 대주교를 만나기를, 그것마저 안 되면 고위 사제를 만나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그들은 문전박대를 당해야 했고 이그네움은 점차 희귀해져 갔다.


헤르논의 시장이자 황금 치유교의 교주인 물러스는 처음 들이닥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자기가 옛 정으로 살려주고 도구로 쓰고 있던 치유사 베일런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대낮에 그의 집이 폭삭 가라앉았고 그 안에서는 아보의 형제들 쪽의 무장한 사제들 9명이 시체로 발견되다니? 그의 교단은 그 사실에 극대노를 하며 순교자 베일런을 위해서라도 아보의 형제들 쪽에 선전포고를 해야한다 조언했다. 허나 물러스는 오랫동안 여우 같은 술책을 부리던 인간이라 촉이란 게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의외로 차분히 광장 맞은 편의 구역 아보의 형제들의 고위 사제들을 불러냈다. 그리고 담판을 지었다.


아보의 형제들쪽에서도 처음 소식을 접할 때는 굉장히 당황한 모양이었고 하필 죽어도 황금 치유교의 사제의 집에서 죽었는 지를 황금 치유교에게 역으로 따져 물으려고도 했다. 대체적으로 서로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는 것을 계속 부정했고 기나긴 평행선을 달리던 언쟁끝에 이 일의 책임을 자신들이 지지 않으려 했던지라 내부적으로 덮고 조용히 넘어가자는 쪽으로 흘러갔다. 물러스는 속으로 벌써 돈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교단의 조언대로 순교자가 되어버린 베일런을 적극 이용 해 먹을 생각이였기 때문이다.

벌써 기념 의식과 행사로 베일런을 향해 위로의 설교와 함께 눈물을 흘리며 아보의 형제들을 비난하면 입지를 강화하기 딱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를 기념하고자 베일런의 금상을 만들기 위한 기부금 행렬도 한껏 기대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 정예 부대이기도 한 아보의 이단 추적대 중 헤르논 파견대가 싸워보지도 못하고 집단으로 죽어버린 사실이 아나티리캄 보호령의 본부를 넘어 아보테의 수도 디고, 즉 아보테 국왕의 귀에게까지 들리게 되었다. 네이즈가 추적대 장교들 앞에서 벌벌 떨듯이 이번에는 추적대장 파사니만이 실신하기 일보 직전으로 국왕 앞에 나섰다. 국왕 아넬피스의 손가락이 한번 튕기는 것만으로도 파사니만의 목은 날아갈 수 있었다. 그간 거의 모든 신하 앞에서 고개를 꼿꼿이 들고 아보테 국경 바깥에선 두번째 국왕이나 다름없었던 그가 아넬피스 앞에서 오줌을 지리기 일보 직전이였던 것이다.

궁정 안에서 아넬피스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조각을 찾겠단 너의 충성은 이해한다만 내 아이들을 쉽게 쓰면 되겠느냐?"

그러자 파사니만이 크게 엎드려 절하며 울먹였다.

"폐하, 신이 죽을 죄를 지었사옵니다. 불충한 신에게 부디 기회를 주시옵소서"

신하들이 양 쪽으로 나란히 서 있었고 가운데엔 파사니만이 바닥에 붙다시피 엎드려 있었다. 높은 왕좌에 앉아 모두를 내려보던 아넬피스의 모습만이 빛이 비추지 않은 곳에 있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왕 앞에 서 있던 모든 이들은 그 공포심이 배가 되었다. 오직 그의 존재는 궁정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로만 느낄 수 있었다.

"고개를 들어라"

파사니만이 그의 옥음을 들으며 엎드리다가 머리만 살며시 올려다보았다. 왕좌에 앉은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넬피스가 일어나 왕좌에서 내려오며 한걸음 한걸음 계단을 밟고 있었고 신하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뒤에 있는 궁정인들이 그의 망토를 살며시 들어올리며 걸음을 조심스레 맞추고 있었다.

이 백색 머릿칼의 젊은 사내는 금실이 들어간 정성스레 만들어진 검은 의복과 함께 머리엔 황금 덩쿨로 꼬아진 고리 왕관을 착용하고 있었다. 옷 밖으로 나온 그의 왼손은 핏기가 없었으나, 오른손은 놀라울 정도로 주름이 많이 잡혀져 있었다. 마치 노인의 손처럼.


아넬피스는 왼손으로 오른손을 덮어 쥐는 게 습관이었다. 그는 손을 그리 한 채 신하들 사이에서 마침내 발을 멈추었다. 눈빛이 촉촉한 파사니만에게 어느새 다가온 국왕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목소리가 울렸다.

"조각. 파사니만아, 지금 당장 네 목을 쳐도 당연히 다른 말을 할 이가 누가 있겠느냐? 아보께서도 나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계신다. 그러나 네 목이 달아나면 누군가 그 자리를 채워야 겠지. 허나 그리되면 우리의 이단들에게 그 소식이 알려 질 게 뻔하지 않겠느냐? 다시 한번 기회를 주겠다. 조각을 회수하라"

파사니만이 다시 고개를 푹 숙이며 엎드린 채로 소리쳤다.

"그러하겠나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모든 신하들이 일제히 외쳤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어둠컴컴한 궁정에서 우연히 비춰진 아넬피스의 얼굴은 창백했고 핏기가 거의 없어 보였다. 그러나 눈동자엔 집념이 보였다. 다시 한번 국왕의 소리가 울렸다.

"반드시"



45화에서 계속...

"때가 차매 그 빛이 다시 솟아나리라"


(매주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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