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빛의 여정 78화 / 7장 흐려지는 하늘
장편소설 빛의 여정 78화 / 7장 흐려지는 하늘
눈을 뜬 로이딘은 이곳이 어디인지 파악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 머리가 압도적으로 지끈거렸고 머릿 속 안이 혼돈 그 자체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광경은 찢어지는 굉음과 함께 검은 섬광이 캠프 안 마당에 내리 꽂히며 어두운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던 것이다. 땅이 갈라지며 그 안으로 사람들과 수레들이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리고... 감옥 중 하나가 통째로 무너지면서 땅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의 비명소리는 잊혀지지 않았다. 시테온은 사람들의 환호에 정신이 팔리다 순식간에 몸이 날아가 상자더미에 부딪혔다. 루네는 시테온을 부르짖으며 달려갔고 로이딘은 쓰러진 시테온과 갈라진 땅 그리고 달려가는 루네를 연달아 바라보다 그렇게 의식이 휘발되어 버렸다.
이제 극도의 적막감만 감도는 어느 어둔 공간에서 고요히 청각이 되돌아 온다. 물 방울들이 똑똑 거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가까운 곳에서는 방울들이 모아져 물 줄기로 변해 바위에 부딪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멀리 흐린 날씨에 바깥 풍경이 보였다. 머리를 짚으며 일어나는 로이딘은 한 번에 일어나기 힘들었다. 도중에 엎드려 잠시 호흡을 고른 후에야 상체를 일으키며 의식을 되찾았다. 이 매끈한 석순들. 서서히 적응해가는 어둠 속 눈동자. 이곳이 어디인지를 파악했다. 동굴. 그것도 세차게 비가 오고 있는 대륙 어딘 가에 있는 흔한 동굴이라 로이딘은 짐작했다. 이제는 입버릇이 되어 위기감이 심적으로 고조되면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그의 주문 단어가 조용히 울리고 있었다.
"피데인티, 피데인티..."
자기가 주문을 외우고 있는 지도 모르다 어느새 자각을 한 순간 그는 입을 멈췄다. 그런데 시테온과 루네는 어디에 있는 걸까? 그는 여기저기 사방을 살펴보아도 자기 외엔 사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떨어지는 물방울만이 그의 감각을 일깨우고 있었고 홀로 남겨진 두려움에 로이딘은 소리쳤다.
"시테온, 루네! 어디 있어?!"
돌아오는 소리는 없었다. 자기를 여기를 데려다 준 이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단서라곤 전혀 없는 이곳에서 서서히 두려움에서 짜증이 몰려 왔다. 하지만 수도원에서 배운 인내의 태도를 견지하며 그는 여전히 미동하지 않은 채 서 있기만 했다. 침이 목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스스로에게 들리자 입 안이 텁텁했다. 동굴 천장 틈새로 흘러 들어오는 물 줄기가 반가웠고 그는 벽을 따라 내려오는 물 줄기가 바위 틈에서 마시기 좋게 고이고 있는 부분을 찾아 입을 가져다 대었다.
그런데 입술이 물에 닿자 물의 촉감이 아닌 이상한 환청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부와 마주쳤을 때의 쫓아가는 추적대의 말 발굽소리, 캠프에서 벌어진 전투 소리, 비명소리, 시테온이 감옥 안 군중에게 환호를 받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자 그는 귀를 두 손으로 막았다. 미간을 찌뿌렸고 눈은 질끈 감았다. 가져단 댄 입은 급히 고인 물에서 떼었다. "....이곳에서 시험하리니"
마지막에 들린 환청이 그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남성과 여성이 뒤 섞인 목소리로 앞 부분은 뭐라 주절거리는 것 같은데 전혀 알아듣기 힘들었다. 주문일까 아니면 단순 헛소리일까? 로이딘은 계속 귀를 막고 눈을 감으며 다른 감각으로 전해오는 미지의 음성을 차단하려 애를 썼다. 속삭임 이어지는 속삭임.
인내의 한계치를 다다른 순간에야 음성이 멈추었다. 헌데 멈추자마자 타는 목마름이 급격하게 찾아왔고 본능적으로 그는 다시 물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다시금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것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그것이 물이라 고백할 수 있는 순간을 맞이한 로이딘은 허겁지겁 마셔댔다. 물 웅덩이가 순식간에 비워졌고 계속 물줄기가 내려와 바위 틈을 채웠다. 그는 만족하지 못해 다시 한번 두 손 만한 웅덩이를 비웠다. 당장에야 급한 불은 끈 듯 한 로이딘은 해갈이 되어 평온한 표정이 자기도 모르게 지어졌다. 급하게 마셔서 상체에 물이 가득 튀었고 입과 목은 물로 젖어있었다. 로이딘은 동굴 안을 이제 자세히 바라볼 수 있었다. 눈도 주변에 적응 되었다.
이곳은 전혀 알 수 없는 곳으로 피부로 느껴지는 공기의 촉감이 무언가 달랐다. 비가 와서 그런지 무겁게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뭐라 이야기 힘든 텁텁함과 건조함이 살아 있는 느낌이 들었다. 쓰러지기 전에 발을 두고 있었던 아나티리캄은 추웠고 수도원에서 오는 동안 비가 오더라도 이렇게까지 묵직함이 느껴지지는 아니했다. 헌데 이곳은 보다 따스했고 보다 깔끔했다. 동굴의 벽도 아나티리캄에서 보던 그런 바위와 돌들과 차이가 있음을 느낀 로이딘은 이곳이 아나티리캄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동시에 소름이 끼쳤다. 그럼 이곳은 어디일까, 밖을 나가볼까? 발걸음을 재촉하려는 때에 혹시 피데라가 자신의 땅으로, 피신처로 데리고 온 게 아닌 지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면 로이딘은 크게 안심할 수 있을 것이며 곧 시테온과 루네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확인하려 동굴 밖으로 향했다. 미세한 빛과 함께 빗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동굴에서 느끼는 묵직한 공기를 온 몸으로 맞으며 먹구름 낀 하늘만을 바라보며 달려갔다.
로이딘은 잠시 후 밖으로 나와서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그것은 피데라가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주었으리란 예측이 빗나갔음과 이곳이 아나티리캄과는 전혀 다른 환경의 땅임을, 마지막으로 이제부터 미래를 걱정해야 할 풍경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로이딘은 몰랐다. 이곳이 상인들의 지도에 표시된 대륙을 한참 벗어난, 최남단 "황량한 구덩이"라는 거대한 섬에 자신이 놓여져 있다는 것을.
79화에서 계속...
"때가 차매 그 빛이 다시 솟아나리라"
(매주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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