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빛의 여정 79화 / 7장 흐려지는 하늘
장편소설 빛의 여정 79화 / 7장 흐려지는 하늘
로이딘의 눈 앞에 펼쳐진 황무지는 아나티리캄에서 보던 빈약한 숲 속을 가진 광야와는 차원이 다른 곳이었다. 이 곳은 대부분 협곡과 거대한 바위, 나무 몇 그루만이 눈곱만큼 땅을 덮고 있었다. 머리가 아찔했다. 다시 한번 의식을 잃을 것 같아 욱신거렸다. 가슴도 철렁 내려 앉아서 그냥 동굴 밖을 빠져나와 언덕 중턱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계속 앞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는 세차게 내리고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채 부딪히는 빗물의 촉감을 느끼고 있었다.
빗 속으로 가려진 시야 너머로 또 무엇이 있을까란 기대는 아직 있어, 로이딘은 황무지가 말을 전해주기라도 할 것처럼 앞을 바라보며 외쳤다.
"시테온 어디있어!"
"루네 어디있어!"
두 친구의 이름을 크게 외쳐보았다. 소리가 넓게 울려 퍼져 언덕 아래까지 퍼지는 듯 했지만 빗소리만 요란하게 들려올 뿐 그 어느 것도 로이딘에게 화답해주지 않았다. 도대체 이곳이 어디일까? 전혀 알 수 없는 이 곳에서 로이딘은 무엇부터 해야할 지 감이 오지 않았다.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데 동굴 밖을 나와 걸어가봤자 체온은 떨어지고 에너지만 낭비해서 목숨조차 위험해 질 지 몰라 섣불리 움직여선 안될 것 같았다. 그렇다고 계속 가만히 있자니 이 답답한 마음과 정체불명의 땅, 친구들의 생사를 알지 못해 불안한 마음은 커져갔다.
결국 비를 계속 맞다보니 조금씩 한기가 들려 동굴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다시 안으로 들어온 동굴은 보다 아늑하면서도 바깥보단 따스했지만 추우면서도 시원했다. 아까 그가 누워 있었던 자리로 돌아가면서 벽에 붙은 작은 이끼들을 스치듯 바라보며 지나갔다. 물기를 접촉하는 이끼들은 간만의 영양분으로 기뻐할 일이겠지만 로이딘은 지금 이 모든 것이 전혀 기쁘지 않았다. 불이 필요했다. 다행히 주머니에 레도룬에서 숙박하기 위해 마을 여성에게 주었던 정제된 이그네움의 남은 몇 조각이 남아 있었다.
피데라의 육체를 태우는 것은 로이딘에겐 죄책감이 들었다. 그러나 이미 피데라시스들도 로이딘 일행 외에는 정체를 알지 못하는 이그네움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피데라가 직접 이야기해준 자신의 육체의 일부인 이그네움을 사용하므로 지금 당장의 생존을 위해 장기적 세계의 보존을 포기하고 있단 말을 다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일단은 살아야 할 것이기 때문에 피데라도 인정해주시리란 기대로 그는 조각을 꺼내 불을 붙이기로 했다.
잠시 일어서서 여기저기 물이 최대한 닿지 않거나 거리가 먼 동굴 한 구석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이끼가 끼어있었고 아직 습기를 머금어 촉촉해지지 않은 건조한 이끼들이 눈에 보였다. 그는 그것을 따서 모아 제자리로 가져왔다. 그리고 조각들을 두 손으로 잡고 서로 맞부딪히며 불똥이 튀게 하려 했다. 강렬한 빛과 열을 내뿜는 이그네움이라 할 지라도 불을 붙이는 것은, 희망고문처럼 될까 말까하면서 계속 그의 근육을 지치게 했다. 도중에 멈춰 한번 크게 숨을 들이쉬고 내시면서 휴식을 취하다가 다시 이를 악물고 두 조각을 맞부딪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불똥이 이끼 틈으로 떨어지더니 약간의 빛이 생겨나 순식간에 이끼 전체를 뒤 덮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기가 피어올랐다. 로이딘은 멈추지 않고 이끼에 공기를 불어 넣어 불을 돋구었다.
불이 붙었다. 그가 나무꾼 생활을 하면서 멀리 떨어져, 밤이 되서 잠시 몸을 피해 하룻밤을 보내야 할 때처럼 마주친 이그네움의 불길은 언제나 반가웠고 따스했다. 그럼에도 진실을 알고난 뒤 뭔가 찝찝한 느낌마저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비록 지금 사용한 이그네움은 원석이 아니라 아보테에서 보급용으로 전파하고 있는 정제된 이그네움이다라고 스스로 합리화 하고 있었지만 왠지 이그네움 없이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영원한 추위를 버틸 수 있을 까 싶었다. 피데라는 자신의 부수어진 육체 조각들을 다시 되찾아야만 하고 그 뜻을 이루어 줄 피조물이자 자녀는 로이딘이었다. 아보테에서 원석들을 계속 찾아내 회수해가면서 더 이상 겉잡을 수 없이 너무 많은 원석이 부수어지고 이그네움의 불길로 사용된다면 피데라는 힘을 잃고 영원히 소멸될 수 있었다. 이 후의 일들은 로이딘의 상상으로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따스한 온기가 그의 젖은 옷과 그 안의 피부로 와닿으면서 약간의 전율이 느껴졌다. 추운 곳에서 있다 따스함을 맞았을 때의 몸 깊숙히 부르르 떠는 그 느낌. 지금 당장 해결된 궁금점과 문제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길 옆에 앉아 불을 보니 이젠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긴장이 스르르 풀리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캠프를 가지 말걸"이란 후회가 들었다. 그랬다면 친구들이 쓰러지고 사람들이 무더기로 죽지는 않았을텐데. 눈 앞에서 벌어진 절망의 광기가 기억났다. 검은 빛이 떨어지고 땅이 갈라지며 그 안으로 감옥 안 사람들이 빨려 들어가버린 것. 순식간에 벌어진 일들이다. 너무나 찰나의 순간에.
그는 눈을 감아보았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해보려 했다. 하지만 아까 물을 마실 때 마주쳤던 속삭임이 마치 생각으로 바뀐 것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혼란한 생각과 기억의 단편들이 교차되어 다가오자 그는 이 혼란한 마음을 정돈하려 그가 가진 확실한 마음의 무기를 쓸 필요가 있었다. 주문을 외웠다. 주문을 시작할 땐 별 다를게 없는 마음의 상태지만 점차 반복할 수록 주문에 집중하게 되고 마침내 몰입하게 된다.
"피데인티, 피데라여 피조물이 빛으로 어둠을 뚫게 하소서"
한 단어 한 단어씩 음미하며 외우다가도 마음 속 혼란이 몰려 들어올 때면 빠르게 반복하면서 그는 리듬을 탔다. 마음에 온갖 불순물들이 가득 끼어있었으나 주문을 외우면 외울수록 그의 마음은 보다 뚜렷해지고 맑아졌다. 문득 스쳐지나간 로이딘의 다른 생각 중 하나는, 전투 수도사란 물리적이나 외형적으로 적과 싸운다는 "전투"가 아닌 마음 속 혼란과 절망에 맞서 싸운다는 의미에서 "전투"가 아닌 지 싶었다. 무엇이 되었든 두 의미 모두 전투 수도사가 해야 할 일들이었다.
80화에서 계속...
"때가 차매 그 빛이 다시 솟아나리라"
(매주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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