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록]1946년, 한국이 일본을 점령했다

25화 - 잠입

by 팬터피

**사장의 집**

전화벨이 울렸고, 사장은 무기력하게 소리를 따라 마루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형님, 접니다.”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목소리는 익수였다. ‘접니다’라는 한마디 했을 뿐이지만 꽤나 다급함이 느껴졌다.


“길게 통화는 못 하고요. 제 신분과 위치가 노출된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사장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어디 갈 곳은 있나요?”


“걱정 마십쇼. 이 넓은 만주에 저 누울 곳 하나 없겠습니까? 저 다물단의 황 단장입니다.”


사장은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길게 통화 못 하니 하나만 약속해 주십쇼.”


“······. 이야기하세요.”


황 단장은 한참을 고민하고 쭈뼛대다 결국 결심한 듯 말을 이어나갔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절대 그 제안은 수락하시면 안 됩니다. 형님이 어떤 생각하시는지 잘 알고 있는데··· 음··· 그걸 받아들이는 순간 형님은 물론 가족분들까지 위험해지는 것입니다.”


“잘 고민해 보겠소.”


“형님, 이건 그냥 요청드리는 게 아니라 단장으로서 명령하는 것입니다. 저희에겐 오래 준비한 중요한 일들이 남아 있습니다.”


“······..”


익수의 제안을 사장은 흔쾌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배신자 한 명이 그의 주변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기 때문에 그는 어찌 됐든 최대한 빨리 그를 색출해야겠단 생각뿐이었기 때문이다.


“황 단장이야말로 배신자 처단한다고 여기저기 다니지 마시고 지금은 우선 조용히 계세요. 자칫 잘못하면 바로 잡힐 수 있으니까요.”


“···.. 네···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사장은 무릎을 꿇은 채 눈을 감고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있었다. 그리고 나서 생각이 마무리되었는지 벌떡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챠샤오빠오**


사장이 식당에 도착했을 때, 츠즈키 경감이 새로 온 젊은 친구에게 총을 들이대며 위협하고 있었다. 그는 옆에 보이는 부엌칼로 이 일본 경찰 놈의 뒷목을 찌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리고 예진이를 죽인 그 배신자 새끼 이름을 토해내라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의 충동적인 행동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


사장의 개입으로 위험한 순간이 지나고, 츠즈키가 기동대와 함께 돌아가자 형원도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식당 문을 나서려는 그때, 마침 일을 하러 들어오는 달수와 마주쳤다. 예진의 죽음 이후 처음 그를 보는 순간이었다.


“야, 이 새끼야! 너 뭐야!”


달수는 형원이 크게 흥분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가 흥분했을 때만큼 실수를 잘 유도할 수 있는 기회는 없다. 식당에서 같이 일하는 녀석은 소름 끼칠 정도로 매번 차분해서 자신이 뭘 더 하기가 힘들었는데, 이 다혈질적인 친구는 잘만 자극하면 뭐라도 나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달수는 대련 테러 사건에 대한 보고서를 떠올리려 애썼다. 그리고 우선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 억울함을 호소하며 그를 떠보기 시작했다.


“뭘 더 증명해야 절 믿어 주실 거죠? 백야 장군님께서 오실 예정이란 것도 말씀드렸는데···. 그럼 당신과 동료분이 대련에서 도망치실 때, 제가 당신을 도왔다는 걸 말씀드리면 믿으시겠어요?”


“뭐······.?”


“제가 그때 두 분을 뵙지 않았다면, 일면식도 없는데 어찌 두 분을 알아보고 연락을 드렸겠습니까? 여기서 이렇게 다시 뵙고 제가 얼마나 신기하고 반가웠는데요.”


“이씨··· 이게 어디서 개수작이야!”


거의 다 넘어왔다. 딱 한마디만 해라. 네가 대련에서 왔다. 단 한마디면 된다··· 달수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그리고 보고서에서 봤던 내용을 떠올리며 연기를 시작했다.


“기억나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두 분 도망치시는 모습을 보고 멀리 광장으로 뛰어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총독님이 피신 중 또 테러를 당하셨다. 저놈들은 미끼다. 전 대원은 광장 앞쪽으로 이동하라.”


“···..”


형원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갑자기 그때가 떠올랐다. 포위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분명 멀리 어딘가에서 누군가 소리치는 게 들렸다. 우리가 미끼고, 총독이 피살당했다고. 그 말 한마디에 포위망이 뚫렸고 다행히 그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이 배신자라 확신했는데, 우리를 그때 도와준 은인이라고?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나? 근데 만약 그가 거짓말을 하는 거라면··· 이걸 어찌 알 수 있지? 이 사람··· 독립군이 맞는 건가? 왜 거기 있었는지 물어보기라도 해 볼까? 여러 가지 생각이 맴돌아 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말씀 중 죄송하지만, 이 분 부상이 심각한데 인력거까지 같이 부축 좀 부탁드립니다.”


형원이 당황해서 어떤 대답을 하려는 찰나에 때마침 진이 나타나 말을 끊었다. 그제야 형원도 정신을 차리고 말을 아꼈다.


“네네, 제가 같이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인력거는 요 바로 앞에 있습니다.”


그리고 달수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으로 최대한 감정을 빼고 말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건지··· 전 대련인지 어딘지는 가본 적도 없습니다.”


주방장을 인력거에 태운 형원과 진은 그렇게 그 자리를 벗어났고, 달수는 바로 눈앞에서 다 잡았다 놓친 사냥감에 안타까워하며 담배를 물었다.


진이 주방장을 부축하고 나간 뒤, 사장은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미안함을 전했다.


“괜히 저 때문에 여러 가지 죄송합니다. 이런저런 일이 너무 많아 어수선하니 약 일주일 정도 가게 문을 닫을까 합니다. 25일까지 쉴 테니 그 이후에 출근해 주세요. 며칠 간의 일당은 챙겨드리겠습니다. 오늘 일 정리하고 나가실 때 꼭 저한테 받아 가세요.”


그렇게 말을 남기고 사장은 주방 정리를 시작했고, 다른 사람들도 별다른 말 없이 자신의 위치로 돌아갔다.


**시내 병원**


형원의 인력거로 주방장을 병원까지 안전하게 데려온 진은 바로 그를 병상에 눕혔다. 다행히 의원이 바로 와서 그의 상태를 살폈다.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술 먹고 시비라도 붙은 거요? 아님 어디서 떨어진 거요?”


“아닙니다. 일본 순사가 화가 나서···”


“흐흠··· 못된 놈들 같으니라고···.”


“상태가 좀 어떻습니까?”


환갑은 족히 넘어 보이는 의원은 환자를 여기저기 유심히 살펴보더니 말했다.


“코뼈가 부러진 듯해서 이걸 좀 맞춰야 할 듯하고··· 이마가 많이 찢어졌고··· 문제는 갈비뼈가 나가서 며칠 입원해야 할 듯싶소··· 근데 돈은 좀 있소?”


“제가 지금 돈이 얼마 없어서요··· 나중에 빌려서라도 갚아 드릴 테니 우선 치료부터 잘 좀 부탁드립니다.”


진의 죄송스러운 읍소에 의원은 퉁명스럽게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됐네. 나도 청일전쟁 때 일본 놈들에게 하나뿐인 형님을 먼저 보냈소. 서러운 사람들끼리 돕는 셈 칩시다.”


“아, 아닙니다. 치료비는 제가 꼭 마련하겠습니다.”


“됐다니까 그러네. 일본 놈들한테 이렇게 당했다는 말을 들으니 내가 돕고 싶어서 그래요. 아무튼 이제 이마부터 좀 꿰매야 하니 나가서 기다려주게.”


치료 때문에 우선 병실에서 나온 그는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형원과 마주쳤다. 자신이 직접 당한 폭행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도 화가 많이 나 있었다.


“좀 어떠셔?”


“여기저기 찢어지고, 갈비뼈도 좀 나간 듯. 입원하셔야 된대.”


“어떻게 사람을 저렇게까지··· 빌어먹을 놈들.”


“그나저나 경찰들 오는 거 알고 식당에 온 거야?”


형원은 익수를 태웠던 이야기부터 달수와 오갔던 내용까지 오늘 있었던 일들을 진에게 알렸다. 짧은 시간 동안 일어났던 많은 일들에 이야기가 길어졌다. 둘은 확실히 오늘 일로 더욱 사장에 대한 믿음이 생겼으나, 달수가 마지막에 했던 말들은 이를 어찌 믿어야 할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확실히 사장은 믿을 만한 사람인 듯해. 그리고 일본 놈들은 그를 독립군으로 의심하는 듯하고. 그래서 계속 건드리는 듯해.”


“응, 나도 그런 거 같아. 근데 대련에서 우릴 도와준 그 소리··· 내가 들었던 그 말과 똑같은 말을 했어. 어쩜 그럴 수 있지? 그가 진짜 우리를 도운 그 사람이 맞는 걸까?”


“나도 아까 그 자가 그 말을 해서 좀 소름 돋았어. 실은 나도 헷갈리긴 하는데··· 어디서 들은 게 아닐까?”


“그래. 그렇다 치자. 그럼 백야 장군님 내용은?”


“그건 그 단체 소속의 배신자도 알 수 있는 거잖아.”


“그는 우리에게 여러 증거들을 보여주고 믿어 달라 하는데, 우리는 그 모든 것을 확실치 않은 추측을 근거로 그냥 밀어내려고만 하네···”


이 도시에 와서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아직도 처음 왔을 때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이제 일주일 정도 남았으니 그때가 되면 더 선명해지겠지···”


“만약 그분이 오신다 해도··· 우리가 어느 쪽을 믿어야 하는지는 확실치 않을 듯한데···”


“근데 문제는··· 만약 달수가 밀정이라면, 백야 장군님도 위험할 수 있다는 거야.”


“그러게. 우리가 막을 방법은 없는 걸까?”


“아무래도··· 그거보단 좀 더 그를 파봐야 할 것 같아.”


형원은 곰곰이 생각했다. 예진이 죽기 전까지 며칠 동안 그를 따라다녔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만두가게와 집 외에는 따로 어디를 잘 돌아다니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미행만 하기엔 시간이 많지 않다··· 뭔가 더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


“내가 지금 그의 집에 가볼게. 어차피 방금 식당에 일하러 나왔으니 밤까지는 별일 없겠지.”


“혼자 위험하지 않겠어?”


“나라의 영웅이신 김좌진 장군님이 위험해지실 수도 있는 건데 이 정도는 영광이지!!”


항상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형원은 이번에도 급히 달수의 집을 가기 위해 자리를 박차고 병원을 나갔다. 그가 나가자마자, 의원이 병실에서 나왔다.


“크게 다친 부분은 잘 치료했으니 걱정 마시고. 환자는 막 잠들었으니 뭐 더 딱히 할 게 없어요. 환자도 보호자분 가도 된다 했으니 이만 가서 일 보세요.”


주방장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마냥 기다리고 있기보단 식당에서 부족한 손을 돕는 게 낫겠단 생각에 진은 서둘러 가게로 향했다.


**달수의 집**


꽤나 높은 담장 안의 마당에는 좁지만 남자 혼자 사는 집 치고 나름 잘 가꾼 정원이 있었다. 주변을 살피고 빠르게 담을 넘은 형원은 인기척을 살피고 집의 문을 살며시 열었다. 역시나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꽤나 잘 정리된 정원에 비해, 집 안은 사람이 사는 집이 맞나 싶을 정도로 뭐가 없었다. 주방엔 조리기구나 소금 등의 양념조차 없었고, 안방은 장롱과 작은 탁자 그리고 의자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뭐만 있다면 금방 찾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형원은 혼자 생각했다.


우선 장롱부터 열었다. 그러나 그 내부도 이불과 옷 몇 벌 외에 뭐가 많지 않았다. 다른 사람 손이 탄 티가 안 나게 하기 위해 서서히 조심히 옷가지들을 뒤적이던 중 갑자기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긴장한 탓에 형원은 전화벨 소리에 깜짝 놀라 잡고 있던 옷을 떨어뜨리고 뒤로 돌아봤다. 처음에는 전화를 받을 생각이 없어 다시 고개를 돌려 떨어뜨린 옷을 다시 주워 옷을 가지런히 개어 원래 자리에 놓았다. 그러나 전화가 계속 오니 누굴지 궁금해졌다. 만약 일본 경찰이나 군 관계자라면? 그렇다면 달수가 배신자라는 것이 확실해지는 것이다. 어찌해야 하나··· 받아야 하나··· 혹시나 받게 되면 누군가 몰래 침입했단 사실을 달수가 나중에 알 수도 있는데···


그렇게 고민하며 전화기 앞으로 다가갔다. 수화기를 딱 잡는 순간··· 전화가 끊겼다. 더 이상 벨소리가 나지 않았다. 형원은 그냥 받을걸 하고 아쉬워하며 고개를 돌렸다.


따르르르릉!


그런데, 다시 벨소리가 들렸다. 그는 다시 전화기로 갔다. 또 똑같은 고민을 했다. 수화기를 잡고 망설였다. 그러다가 결국 수화기를 들었다. 그리고 귀에 대고 아무 말도 없이 있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안 들리나?”


형원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깜짝 놀랐다. 목소리가 너무나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지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누구였더라.


“여보세요? 왜 말을 안 하나?”


그제야 형원은 이 낯익은 목소리가 누구인지 기억해 냈다.


‘아! 이럴 수가.’


[독립운동가 인물 평전]


김창숙 (金昌淑, 1879~1962)


유림 출신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로, 항일투쟁과 민족교육에 헌신한 인물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의 처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친일 단체인 일진회(一進會) 성토 건의서를 냈다가 다시 체포되었고,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려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이후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또한 항일 비밀결사 다물단의 조직에 참여하여 친일파 응징과 독립운동 지원 활동을 펼쳤다. 1930년대에는 조선학운동을 주도하며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고, 해방 후에는 성균관대학교 초대 총장으로 전통 교육과 민주주의 확립에 기여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출처:**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김창숙 평전』(박정신,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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