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 또 다른 지배
**남대문시장 주변 공터**
그때 겁에 질린 다른 일본인 일행이 도망치려 하자 형원은 다시 총을 겨눴다. 진은 이번엔 형원의 팔을 꺾어 총을 낚아챈 뒤 옆으로 던져버렸다.
오랜 친구에게 공격을 당한 형원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친구를 때릴 순 없었기에 그냥 총을 다시 주운 뒤 자리를 옮겼다.
한반도 전체가 해방의 기쁨으로 들떠 있었지만, 형원은 그렇지 않았다. 모든 상황이 그의 기대와는 다르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걸어가는 그를 따라가며 진이 따지듯 물었다.
“잊자 이제. 다 끝났어. 목표한 걸 이뤘잖아.”
형원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난 이대로는 억울해서 못 살 것 같아.”
진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일본이 항복했고 우린 꿈에 그리던 독립을 했어. 근데 뭐가 더 필요해?”
“난 내 가족의 원수들을 내 손으로 직접 처단하고 싶었어. 근데 그들에게 심지어 사과조차도 듣지 못한 채 이대로 집에 돌려보낸다니 울화통이 치밀어 올라 미치겠어. 봐봐. 저 놈들. 반성의 기미도 없잖아!”
진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차분히 그를 달랬다.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을 뿐이야. 그리고 우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운 거지 개인의 원한을 해소하기 위해 우리의 청춘을 바쳤던 건 아니잖아.”
“너의 말도 맞지만, 넌 진짜 단지 그 고귀한 마음으로만 총을 들었던 거야? 처음부터 지금까지?”
“아니라고는 못하지만, 난 복수심보단 나라를 되찾고픈 마음이 언제나 우선이었어.”
친구의 고결함에 비해 복수를 위해 독립운동을 한 게 무엇이 문제인 건지 형원은 곰곰이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목숨을 내놓고 인생을 바쳐 희생한 이유는 복수심이 아니고는 설명이 되질 않았다.
“난 모르겠어. 우리 형제들이 피 흘리지 않고 나라를 되찾은 건 기쁘고 다행이지만, 그들에게 어떤 죄도 묻지 않고 이렇게 돌려보내는 건, 같이 싸우다 먼저 간 형제들에게 너무나도 미안한 마음이야.”
“계속 말하지만, 더 발생할 수 있었던 형제들의 희생을 막았으니 이제 된 거라 생각하자. 이 문제를 복수와 같은 사사로운 감정들로 연관 지으려 하지 마.”
“그래. 다 끝났는데 뭘 더 어쩌겠어. 근데 아까 저 새끼를 보고 깨달았어. 아직 못 돌아간 쪽바리 놈들 다 죽이고 그 재산들 모아서 사람들에게 나눠주던지 해야겠어. 그래야 울분이 풀릴 것 같아.”
형원이 당당하게 꺼낸 위험한 발언에 진은 깜짝 놀랐다. 이건 엄연한 범죄이고, 그로 인해 그 자신도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건 그냥 학살일 뿐이야.”
“학살이라니? 당한 것을 되갚아 주는 것뿐이야. 그리고 그 새끼들이 우리나라에서 착취해 간 것들을 그냥 가져가게 두는 것도 너무 억울해.”
“그들의 행위가 잔인했지만, 지금은 단지 항복한 나라의 일반인일 뿐이야. 그들에게 해를 가하는 건 잔인한 학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냐.”
“그래 좋아. 학살이라고 하자. 그래도 상관없어. 난 그들이 한 짓거리에 대한 복수를 하는 거니까. 그들도 내 가족을 학살했잖아.”
“그 사람들이 너의 부모와 우리 형제를 죽인 사람들도 아니잖아. 이건 너무 어리석은 복수야.”
오가는 언쟁으로 짜증이 난 형원이 소리쳤다.
“내 가족은 아니지만 한국인 누구에게라도 해를 가했겠지. 난 그들의 복수를 대신 해 주는 거라 생각할래. 비켜.”
“개소리로 포장하려 하지 마. 그런 행위들은 화를 표출하는 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냐. 넌 그냥 일본 놈들과 똑같은 짓을 하게 되는 거라고.”
오랜 친구인 진의 이 말에 형원은 욱해서 상대를 노려봤다.
“뭐? 이 미친놈이. 내 부모를 죽인 원수 새끼들과 날 같은 사람 취급하는 거야?”
“네 입으로 말했잖아. 그 놈들이 한 그 몹쓸 짓을 너도 복수란 이름으로 똑같이 하겠다고. 그럼 그냥 똑같은 놈 아닌 건가?”
“야! 말 다했어!”
진의 논리적인 비아냥에 화가 끝까지 난 형원이 씩씩거리며 아까 들고 있던 총을 진에게 겨눴다. 진은 그의 어이없는 태도에 짜증이 나 그를 노려보았다.
“왜? 나도 죽이게? 어디 한번 쏴 봐.”
한동안 둘 사이엔 그렇게 적막이 흘렀다. 총을 든 손을 쳐내며 진이 비난하듯 한숨을 내뱉었다.
“넌 미쳤어. 알아서 해라.”
그렇게 진은 그 자리를 떠났다. 형원은 진이 가는 걸 지켜보며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꺼내 물었다.
큰 소동이 한바탕 지나간 뒤, 수군대며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하나둘 흩어졌다. 그 와중 두 남자가 먼발치에 숨어 형원의 뒤를 밟았다.
**종로경찰서**
독립 후 경찰서 등 행정기관 일부에서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부 친일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미군정이 시행되자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다른 유사한 행정기관으로 들어간 것이다. 미군정은 이에 크게 예민하지 않았고, 그들은 오히려 오랜 기간 일본인들 밑에서 유사한 일을 해왔기에 업무에 대한 적응이 빨랐다.
서대문형무소에서 교도관이었던 미쓰라 역시 경찰서에서 한국인 이름 노덕수의 명찰을 달고 수사과장을 하고 있다. 그는 이곳에서도 뇌물 등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과장님, 이야기 들으셨어요?”
“어떤 이야기?”
“다음 주가 일본 총감 그 개자식 배 타는 날이잖아요.”
“그건 나도 알아.”
“근데 미군정에서 위험할 수 있으니 호위 인원 추가를 요청했대요. 저희 서에요. 그래서 좀 이따 여기 들렀다 갈 거래요.”
노덕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서 신분을 잘 감추고 있는데 자신의 과거를 아는 그놈을 마주친다면··· 행여나 그놈이 날 아는 체라도 한다면··· 난 이제 끝이다.
“이게 말이 되나요? 그딴 놈을 경호씩이나 해 가며 집에 가는 길을 배웅해야 한다니···”
“그래서 언제 온대?”
“이제 좀 있다가 올걸요.”
그 말을 듣고 노덕수는 벌떡 일어났다. 그놈이 오기 전에 여길 나가야 한다. 마주치지 않는 게 최선이다.
“과장님, 어디 가세요. 행여나 해코지하려는 거면 포기하세요. 안 그래도 서장님이 형님처럼 독립군 출신분들 욱해서 딴짓하면 가만 안 두겠다고 신신당부하셨어요.”
“아, 그래도 내가 독립운동만 몇 년인데. 이 나라의 원수를 코앞에서 보게 될 절호의 기회인데.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아휴. 형님. 호위 인원만 스무 명이 넘는데요. 그냥 저랑 여기서 나가시죠. 마주치지 않는 게 좋겠어요.”
덕수는 부하직원의 나가자는 권유에 애써 따르는 척하며 서를 나가려 했다. 억지로 떠밀리는 척 문을 나서려는 순간, 반대쪽에서 문이 열렸다.
엔도 총감의 경호팀이었다.
덕수는 순간 덜컹했다. 여기 사람들은 다 자신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줄 안다. 총감이 날 알아본다면 여기 사람들이 과연 뭐라고 생각할까.
“형님, 형님, 가만히 계세요. 아무 짓도 하시면 안 됩니다.”
“야. 놔. 놓으라니까.”
큰 덩치에 힘까지 센 부하 놈이 설상가상으로 그를 옴짝달싹도 못하게 팔을 콱 붙들었다.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인생에서 이렇게나 긴장되는 순간이 몇 번이었을까. 이젠 될 대로 되라라고 생각한 순간 엔도 총감이 거만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지나갔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자신을 아는 체하지 않았다.
“이제 놔. 아무것도 안 한다고.”
다행이라 생각한 덕수는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그래. 저놈이 지금 나한테 인사를 해서 뭐 하겠냐. 괜히 걱정했네.’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자리를 정리하고 있는데, 두 남자가 헐레벌떡 사무실로 들어왔다. 아까 시장에서 형원을 몰래 쫓던 남자들이었다.
“너희는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어수선하냐?”
“방금 남대문시장 쪽에서 살인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럼 바로 체포했어야지. 왜 그냥 와?”
“그게 좀 애매합니다. 살해당한 놈이 일본 사람입니다. 그리고 총은 그 일본 놈이 먼저 꺼냈고요. 다툼 중에 총격이 있었던 거라···”
덕수는 이거다 싶었다. 미군정이 일본인에 대한 공격을 문제시하고 있는데 심지어 살인사건이다.
문제를 크게 만들어 미군정에 잘 보고하면 그놈들에게 점수를 딸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래도 살인은 살인이니깐. 지금 미군정에서 요청한 것도 있고 하니, 우선 잘 조사하고 체포하는 쪽으로 진행해.”
**시장 국밥집**
형원은 광복 이후 혼란스러웠다. 자신은 분명 나라의 독립을 원하고 있었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 모든 게 허무했다. 거기에 약 15년을 동고동락한 진과 그 사건 이후로 며칠을 남남처럼 지내다 보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상대도 없었다.
‘내가 진짜 원했던 건 우리나라의 독립이 아닌 그냥 일본인들에게 총질해 대는 것이었던가? 그렇다면 이제 난 무엇을 해야 하지?’
이런 고뇌를 하며 그는 며칠을 주막에서 술만 마시고 있었다. 그때 거친 숨을 몰아쉬며 독립군 시절 동료이자 같은 숙소를 쓰고 있던 우진과 진호가 뛰어왔다.
“형님, 큰일 났습니다. 경찰서에서 형님을 잡아간다고 다녀갔어요.”
“이러지 마시고 빨리 어디 숨으시던지 하셔야 할 듯합니다.”
[독립운동가 인물 평전]
문태수 (文泰洙, 1883~1921)
평안북도 의주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만주로 넘어가 대한독립단과 북로군정서에서 활동하며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그는 주로 독립군 군자금 모집과 병참 업무를 맡아 독립군의 기반을 다졌으며, 청산리전투에도 간접적으로 기여했다. 이후 일본 헌병에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받다 1921년 순국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출처 :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