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가장 당신답게 만드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너에 관한 중요한 사실은 바로 너라는 거야.
너는 아이였고, 무럭무럭 자라서 지금은 어린이고,
앞으로 더 자라서 어른이 된다는 건 틀림없어.
하지만 너에 관한 중요한 사실은 너는 다른 사람 아닌
바로 너라는 거야"
마치 선물상자를 푸르는 듯한 느낌을 주는 마거릿 와이즈 브라운의 그림책 '중요한 사실' 에서 맨 마지막에서 만날 수 있는, 내가 가장 좋아해 마지않는 문장이다. 시간이 흘러도 결코 변하지 않을 사실은 바로 너라는 것. 무심결에 보아넘기던 책에서 저 마지막 문장 하나가 잔잔하던 내 가슴을 쿵 울려왔다.
책의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그림책의 내용은 어떤 사실에 대한 그림책이다. 숟가락 데이지꽃 비 바람 신발 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이나 풍경에 대한 중요한 사실이 주욱 늘어져 있는 그림책. 특별한 내용이 아닌 사실에 대한 열거방식이라 지루하지 않을 까 생각했지만 읽다보니 사물의 본질에 대해 생각을 하게 만드는 "특별한" 책이었다. 이 책의 특징을 내 나름대로 한 줄로 요약해보자면 평소 무심코 보아넘기던 것들이 가진 본질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자 이다.
본질이라는 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사물이 본디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성질이라는 뜻이다. 그림책의 제목과 일맥상통하는 말같다. 어떤 상황에도 변하지 않는 중요한 사실 말이다. 국을 끓이다보면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오는 데 그 거품을 걷어내고 맑고 보얀 얼굴은 드러내는 국물 같은 것. 책을 읽다보면 주변 사물에서 확장해서 결국엔 나에 대한 중요한 사실이 무엇인지 깊이 통찰해보게 된다.
지난 몇 주간 글도 잊고 살만큼 바쁜 나날에 허덕이며 살아왔다. 3월 새학기를 시작하면 으레 그렇듯 교사들은 쉴틈없이 바쁜 나날을 보낸다. 화장실도 꾹 참다가 도저히 견디지 못할 정도가 되면 가고, 컵에 차한잔 느긋이 우려내어 마실 틈 없는 그런 빼곡한 일상. 거기다 둘째는 유치원을 갓 들어간 터라 아침마다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울어대며 가뜩이나 정신이 흐트러진 새 학기 첫주에 나의 혼을 쏙 빼놓았다. 그러다보니 글을 쓰거나 책장을 넘기는 것도 내겐 사치였다. 그렇게 나는 몇주간 내게서 중요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지냈다.
하루에도 수십개의 가면을 쓰는 나. 학교에서는 담임교사로 바쁜 새학기를 보내느라 여념이 없고, 집에 돌아와서는 쌓인 빨랫감와 사투하고 저녁이 돌아오면 허겁지겁 냉장고 속 재료를 꺼내어 출근복을 입은 채 땀을 내며 불앞에서 요리를 하고, 식사 후엔 두 아이의 새학기 증후군 투정을 오롯이 감내해야 하는 일상. 그 속에서 진정한 나란 존재하지 않는 듯 했다. 집에 오면 선생님 가면을 벗어던지고 엄마와 아내의 가면을 쓰고 피로라는 먼지가 온몸에 그득 쌓인 채 잠이 들고, 그 먼지를 채 털어내지도 못한 채 겨우 눈을 떠 다시 선생님 가면을 쓰는, 쳇바퀴 도는 일상에 지쳐만 갔다.
여느 때와 같이 숨이 턱턱 막힐 만큼 쏟아지는 업무메세지를 도장깨기하듯 겨우 처리하고 한숨을 돌리는 중, 책꽂이에 꽃힌 그림책 "중요한 사실"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작년에 새학기를 시작하며 아이들과 함께 읽어주곤 방치해 책머리에 먼지가 보얗게 쌓여 있었다. 올해는 유독 새학기 첫날부터 몰아치는 업무 탓에 이 책을 읽어주지 못했네 라고 속으로 작게 되뇌이며 책을 빼들었다. 책 표지는 하나의 선물상자처럼 되어있어 얼른 다음장을 펼쳐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솟구친다. 열심히 한 주를 보낸 내게 선물을 준다는 심정으로 한장 한장 읽어나갔다.
맨 첫장을 열면 등장하는 그림은 바로 숟가락. 포근하고 따스한 그림체가 지친 내 마음을 따스히 안아주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책을 읽다보니 앞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반복되어 운율감이 느껴져 노래를 부르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숟가락에 관한 중요한 사실은 숟가락으로 밥을 먹는다는거야. 숟가락은 작은 삽처럼 생겼고,손으로 쥘 수 있고..등등. 하지만 숟가락에 관한 중요한 사실은 숟가락으로 밥을 먹는 다는 거야."
처음엔 그저 단순한 사실의 나열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 책이었지만 다양한 사물의 중요한 사실에 대해 반복적으로 탐구해나가면서 "본질"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숟가락, 데이지꽃, 비,바람,하늘,신발 등의 사물과 풍경은 다양한 사실을 가지고 있지만 중요한 사실은 바로 하나. 그들이 가진 본질이다. 숟가락은 밥을 먹는 데 사용하고, 데이지 꽃은 하얗고, 비는 모든 걸 촉촉히 적신다라. 무심코 보아 넘기던 사물에 대한 깊은 사유를 하도록 연습하면서 종내에는 자신에 대한 깊은 사유로 안내하는 느낌이 드는 책이다.
책의 마지막 장을 펼치면 맨 위에 언급한 너에 대한 중요한 사실이 나온다. 나의 얼굴을 비출 수 있는 거울지도 함께 나와서 처음엔 화들짝 놀랬다. 너라고 언급되어 있지만 독자들은 안다. 그 너는 바로 나라는 사실을. 오랜만에 책의 마지막 장을 펴들고 갑작스레 거울지에 미친 내 모습이 일순 어색하게 느껴졌다. 눈코뜰새 없은 하루를 보내느라 거울 한 번 못봤다는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이다. 거울지에 비친 내 모습에 잠시 손이 곱아들었지만 용기를 내어 응시하며 나도 나에 대한 중요한 사실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았다.
그간 내가 나에 대해 잊고 살았던 중요한 사실이 무엇일까? 그러고보니 글쓰기와 많이 멀어졌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친다. 글을 쓰는 동안은 온전히 내 자신이 된 것 같았고, 글 한자한자에 내 생각을 녹여내며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더 성장한 내 자신을 발견하며 뿌듯해하던 기억. 멋들어지고 흡족스러운 글 한편을 써내고 나면 속에서 묵은 체증이 단숨에 내려가는 듯한 상쾌함과 개운함을 동시에 느끼곤 했다. 하지만 요 근래엔 그럴 틈도 없었으니 나는 나 자신을 온전히 잃어가고 있던 셈이었다.
정신히 흩날리던 지난 2주를 보내고 나서 맞은 주말, 나에 대한 중요한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며칠 째 방치된 노트북을 열고 굳어있던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마 전 읽은 중요한 사실 책에서 내게 깊은 울림을 준 문구를 보며 나의 본질을 찾아가보겠노라고.
"나에 대한 중요한 사실은 내가 글을 쓸 때 진짜 내가 된다는 거야. 나는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바쁜 업무에 아이들 수업에 눈코뜰새 없는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집안일을 하고 저녁을 짓고 두 아이 육아에 전념하며 하루를 마무리하곤 하지. 그러다보면 가끔 내가 누군가에 대한 생각을 하며 우울의 늪에 빠지기도 해. 하지만 나에 대한 중요한 사실은 내가 글을 쓸 때면 가장 행복하고 오롯이 내가 된다는 사실이야"
나에 대한 중요한 사실을 쓰다보니 다시금 알게 되었다. 이렇게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진짜 내가 될 수 있다고. 그 어떤 가면도 필요없이 오롯이 맨얼굴로 눈처럼 새햐얀 배경에 발자국을 내듯 한자 한자 써나가는 지금 이순간이 가장 나 답고 행복한 순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볼품없는 이 글 한편을 쓰면서도 아이의 아침을 틈틈이 준비하고, 두 남매의 싸움을 중재하며 몇 개의 가면을 썼다 벗었다 했지만 그래도 이 글에 푹 빠져있는 동안 중요한 사실은 바로 진짜 나로서 썼다는 사실이다. 문득 내 옆에 놓인 거울을 보니 이주내내 좁혀져있던 미간이 스르륵 풀려있었고, 마음 속 쌓인 이주치의 먼지는 방금 환기를 위해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한순간에 날아간 느낌이었다.
변화무쌍한 시대를 사는 요즘, 바쁜 하루에 몇개의 가면을 쓰고 벗고 하며 나 자신을 잃어갈 때 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나에 관한 중요한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 아닐까? 나의 본질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나를 소중히 여겨주는 것이 행복한 삶에 다가갈 수 있는 가장 최단거리 일테니까. 그리고 내가 가진 본질이 흐트려지지 않도록 매 순간 거품을 걷어내주는 노력도 꼭 필요하고.
또한 내가 중요한 사실을 가진 존재임을 인식하다보면 다른 사람이 가진 중요한 사실에도 귀기울이게 되고 그 과정에서 나와 다른 누군가도 소중히 여기는 그런 따뜻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이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을 언급하며 나를 나로서 존재하게 만드는 글쓰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당신에 대한 중요한 사실은 바로 당신 자신이라는 거야"
당신에 대한 중요한 사실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