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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로프 Nov 23. 2024

거리의 예술가

티티와 달빛의 여왕

지난밤에 열어놓은 창문 밖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티티는 눈을 떴다. 살짝 한기가 느껴졌다. 지루할 정도로 더웠던 여름도 다 지나가고 가을이 오긴 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티티는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한창 요리 중인 어머니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글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프라이팬 옆에서는 냄비가 끓는 중이었다. 그녀가 세수를 하고 자리에 앉자 식탁 위에 음식이 놓인 모습이 보였다. 접시 한가득 담긴 달걀 프라이와 빵, 수프였다. 아침으로 먹기에는 많은 양이었다. 티티가 깨작거리자, 어머니가 말했다.

“군소리 말고 다 먹어. 많이 먹어야 제대로 일하지.”

티티는 아무 말 않고 달걀의 흰자 조금, 빵 절반, 수프 몇 술을 뜨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식욕이 없는 채로 깨작거리다가는 버스 시간에 늦기 십상이었다. 시계를 보니, 곧 준비하고 나갈 시간이었다. 그녀는 이를 닦고 옷을 챙겨입고는 집을 나섰다. 뒤에서 어머니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무시하고 문을 닫았다. 그녀는 정류장으로 달려가 버스를 타고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깜빡 잠들었다 깨니, 몇십 분이 지나 있었다. 버스에서 잠드는 것도 일과이다 보니 감이 생긴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일터에서 도착하기 오 분쯤 전에 잠에서 깼다. 그녀의 직장은 주택가 한가운데 자리한 우체국이었다. 주변에 사람이 많이 살다 보니 항상 손님이 많았다. 티티는 직장에 발을 들일 때면 언제나 멈칫하곤 했다. 그녀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심호흡을 한번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전에 조금 한가한가 싶더니, 손님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티티는 손님들이 곳곳으로 부치는 다양한 편지와 짐들을 부쳤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하다 보니 점심시간도 지나고 오후가 되었다. 오후에도 손님은 여전했다. 끊길 만하면 새로운 사람이 오고, 처리할 물건의 양이 많다 싶으면 사람이 밀렸다. 다섯 시가 넘어서도 북적거리던 우체국은 집배차가 떠나고 나서야 줄어들었다. 티티는 완전히 녹초가 된 기분으로 일터를 나섰다.

우체국 근처에는 공원이 하나 있었다. 공원은 가로수가 심긴 돌길과 이어졌다. 돌길에는 사람들이 앉아서 쉴 수 있게 벤치를 설치해 놓았는데,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편이었다. 때때로 그곳에서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노래가 좋으면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일부는 노래를 조용히 따라 불렀다. 이름 모를 가수들은 즉석에서 공연을 하고 박수를 받았다. 박수갈채가 울려 퍼지면 노랫소리도 커졌다. 

그날도 공원에서는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또 노래를 부르는 것이겠거니 하고 지나치려던 티티는 잠시 멈춰 섰다. 노랫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귓가에 들려오는 것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소리 뿐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공원 쪽을 바라보았다. 가로수 너머로 악사의 모습이 보였다. 달처럼 창백한 안색과 호리호리한 체구를 지닌 남자였다. 그는 조금 상기된 얼굴로 바이올린의 현을 켜고 있었다. 그가 연주하는 곡은 차분하고 섬세했다. 풀벌레 소리와 어우러질 정도였다. 

확실히 유행하는 스타일의 곡은 아니었다. 흥겹거나 소리가 커서 사람들의 눈길이나 발길을 사로잡지도 않았다. 그의 노래를 듣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길을 지나쳤다. 가끔 멈춰 서는 이들이 있긴 했으나, 잠시였다. 그는 한 곡을 거의 혼자서 연주하다시피 했다. 

연주가 끝나고 남자는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멈춰 선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발견하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는 그대로 앉아 하염없이 바이올린만 내려다보았다. 티티는 그의 노래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은 것은 오롯이 자신뿐임을 알아차렸다. 남자는 가로수 너머에 서 있는 그녀를 보지 못한 듯했다. 티티는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버스가 도착할 시간이었다. 그녀는 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녀 뒤로 다시 바이올린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 티티의 머릿속에 희미한 형상 하나가 떠올랐다. 알 듯 말 듯한 형상이었다. 티티는 버스에 올라타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자, 머릿속에 떠올랐던 형상이 흐릿해지면서 사라졌다. 별것 아니겠거니 하면서 그대로 넘기려 했지만, 신경이 쓰였다. 잘 알던 단어를 갑자기 잃어버렸을 때 느껴지는 것과 비슷한 답답함이 마음속을 가득 채웠다. 대체 무엇을 잊어버린 것일까?

집에 돌아온 티티는 저녁을 먹고 씻자마자 노곤함에 곧장 침대에 누웠다. 머리로는 시간을 생산적으로 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마자, 머릿속에 하루의 잔상들이 휙휙 스쳐 지나갔다. 특별한 것 없는 기억들이었다. 그러다 막 공원의 모습이 지나갈 무렵, 그곳에서 들었던 노랫소리가 떠올랐다. 기억해 내지 못했던 형상도 다시 머릿속 한 부분을 채웠다.

티티는 눈을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조금 벌어진 커튼 틈 사이로 달빛이 새어 들어왔다. 창밖에 뜬 달은 창백하면서도 동그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달을 보자, 잊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기억이 났다. 

그것은 달빛의 여왕이었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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