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로프 Dec 07. 2024

흔적

티티와 달빛의 여왕

잊었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르면 어떤 기분이 들까? 사람마다 다를 것이었지만, 티티가 느낀 것은 당혹감이었다. 달빛의 여왕이 기억났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와는 다른 의미가 있었다. 달빛의 여왕은 인간이 그리는 꿈의 원형이라고 불러도 좋았다. 그녀는 꿈과 같은 존재였다. 이룰 수 있든 그렇지 않든 의미는 같았다. 꿈을 지닌 사람은 누구나 달빛의 여왕을 알았다.

티티가 그녀를 알게 된 건, 아주 어린 시절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거의 누구나 꿈이 있다. 다른 사람이 터무니없다고 하더라도 주눅 들지 않는다. 상상하는 세계가 현실이라고 믿고 그것이 현실로 이뤄질 것이라 믿는다. 꿈은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시점은 사람마다 다르다. 애석하게도 너무 이른 나이에 알아버리는 사람도 있고, 괴짜나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비웃음당해도 오랫동안 꿈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티티의 경우는 너무 빠르지도 늦지도 않았다. 대학에 들어갈 때쯤 꿈을 잊어버렸다. 고등학교에 다니며 인간도 철창에 갇힌 설치류의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았던 터였다. 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없음을 알아차렸다. 특별함도 개성도 능력도. 친했던 친구들이나 부모님, 대학과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도 비슷했다. 티티는 묵묵히 하루를 보냈다.

이제는 꿈 같은 것이랑은 상관없는 삶을 산다고 생각했는데, 달빛의 여왕이라니. 꿈이라니. 티티는 한숨을 내쉬며 버스에 올라탔다. 하필 그날 저녁은 달이 밝았다. 밝은 달 쪽으로 눈길을 돌리기만 해도 여왕의 모습과 함께 잊어버린 꿈이 떠올랐다. 그녀의 꿈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화가가 되고 싶었다. 

그림 그리는 것이 좋았다. 붓을 가지고 노는 것이 재미있었다. 물감을 섞어 새로운 색을 만들어 내는 것이 신기했다. 예쁜 그림을 보면 따라 그리고 싶었다. 그림을 잘 그리고 싶었다. 스스로 만족할 만한 아름다운 것들을 그리길 원했다. 손이 따라주지 않아도 결과물이 엉망진창이라도 밤을 새워 그림을 그린 날들도 많았다. 누군가의 칭찬을 받으면 기쁘기도 했고 때로는 타인의 칭찬을 위해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만족이었다. 만족할 만한 그림을 그린 날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했다. 그런 그림은 타인에게 보여주더라도 대개 반응이 좋았다. 그래서 티티는 행동이나 말처럼 그림에도 사람의 기분이 담겨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버스에서 내린 티티는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잡화점 앞을 한참이나 서성였다. 그림을 그리지 않은 지 너무 오래되어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했다. 그녀는 쉽사리 용기를 내지 못하다가 잡화점에 우르르 몰려가던 학생들 무리에 섞여 겨우 안으로 들어갔다.

학생들은 마침 미술 시간에 필요한 준비물을 둘러보고 있었다. 티티는 학생들 옆에서 기웃거리며 화구와 스케치북을 여럿 둘러보았다. 마지막으로 그림을 그린 날부터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미술 관련 용품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녀는 용기를 내서 작은 스케치북 하나와 그림을 그릴 때 쓰는 펜, 색연필을 집어 들었다. 짙은 색의 쇼핑백도 하나 샀다. 가족들에게 다시 그림을 그려보려는 마음을 가진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잡화점에 발을 들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학생들 무리에 섞여 바깥으로 나왔다.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지만, 듣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학생들이 만약 고등학교에 다닌다면, 자신과 같은 학창 시절을 보내지 않길 바랐다.

집에 도착한 그녀는 방에 가방과 화구를 내려놓고 저녁을 먹었다. 아버지는 이미 저녁을 먹고 TV를 보고 있었다. TV에서는 어느 성공한 가수의 삶에 관한 방송이 나오는 중이었다. 아버지는 조용했다. 어머니는 티티에게 식탁에 저녁을 올려놓으며 내일 할 요리에 관해 말했다. 여전히 청자 없는 이야기였다. 티티가 저녁을 대충 먹는 둥 마는둥 하는데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돈 많이 벌고 좋겠구만. 목소리 하나로 저렇게 많은 돈을 벌다니.”

“그렇죠? 그 가수 정말 못하는 게 없더라구요. 노래만 잘 하는게 아니라 음식도 잘 해요. 저번에 어떤 프로그램에 나와서 직접 개발한 요리를 만들었는데, 먹어본 사람들이 다들 놀라더라니까요?”

티티는 부모님의 대화를 들으며 밥을 먹다가 그릇을 치우곤 방으로 올라갔다. 본래는 씻고 침대에 누워있다가 잠드는 것이 일상이었지만, 그날은 오랜만에 책상 앞에 앉았다. 쇼핑백에서 화구와 스케치북을 꺼내긴 했는데, 막상 그러고 보니 막연한 생각만 들어 한참 멍을 때렸다. 그녀가 스케치북의 겉표지를 넘기고 펜을 든 건, 창밖으로 달빛이 스며들었을 때였다. 

오랜만에 펜을 잡아 굳어버린 손을 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터였다. 그동안 그림을 그리며 쌓아온 실력이 흔적처럼 남아 아주 못 봐 줄 정도의 그림을 그린 건 아니었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얻지는 못했다. 티티는 결국, 뭔가 완성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선 긋는 연습을 하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티티는 퇴근 후 잠자리에 들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선을 긋고, 면을 그리고, 구도를 잡고 그 위에 얼굴과 머리카락, 몸을 그렸다. 사람의 형태가 완성된 후에는 이목구비를 그려 넣었다. 이목구비는 그림의 가장 작은 부분을 차지하지만, 힘과 노력은 가장 많이 들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 고치고 또 고치다 보면 스케치북이 너덜너덜해져 회색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역시, 그림 그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무거나 막 그리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라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는 것이 어려웠다. 세상살이는 무엇 하나 쉬운 게 없지만, 예술이 어려운 이유는 시간을 아무리 많이 들여도 스스로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고, 설령 스스로 만족하는 결과물이 나오더라도 그것을 세상에 내보냈을 때 인정받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원치 않더라도 예술의 가치를 따져야 하는데, 예술의 세계에서는 한 시간을 들인 그림이 만 시간을 들인 그림보다 더 높은 값어치를 얻는 경우도 많았다. 티티는 복잡한 심경으로 작업을 계속했다. 

그녀가 겨우 그림을 완성한 건, 몇 주가 지나서였다. 분명 머릿속으로 떠올린 그림은 멋진 예술 작품이었는데, 완성작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달빛의 여왕을 그린다고 그렸으나 완성된 것은 누더기의 여왕에 다름없었던 것이다. 티티는 너무 많이 고쳐 너덜너덜해진 스케치북을 만지작거리다가 덮었다. 갈 길이 멀어도 너무 먼 느낌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계속 그림을 그렸다.

티티가 부모님과 함께 사는 아파트는 번화가와 아주 멀지는 않은 곳에 있었다.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을 지나면 도착할 수 있는 장소였다. 그녀는 퇴근 후 대개 일찍 집에 들어가곤 했으나, 어떤 때는 번화가 쪽에서 약속을 잡기도 하고 혼자서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저녁을 먹고 집에 가기도 했다. 

가을에는 축제가 많았다. 대형 쇼핑몰이나 인공 호수 근처는 밤늦은 시간이나 주말에도 축제가 열려 시끌벅적했다. 깊어진 가을의 어느 금요일 저녁, 티티는 약속도 없는데 홀로 쇼핑몰을 구경하다가 인공 호수 쪽으로 걸어갔다. 축제가 열렸는지 야시장에 노랫소리에 시끌벅적했다. 사람 많고 시끄러운 것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티티는 오랜만에 그런 분위기를 느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호수를 빙 둘러싼 야시장과 축제의 현장을 하나씩 구경했다. 사람들이 많아 길을 지나는 것이 쉽지 않았으나 그녀는 때때로 보이는 틈을 찾아 발걸음을 옮기며 나아갔다. 

호수를 반 바퀴쯤 돌았을 때였다. 사람들이 잔뜩 모인 산책로 사이로 누군가가 지나가고 있었다. 티티는 그녀를 보고 깜짝 놀라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어 눈을 몇 번이나 비볐다. 그녀 앞으로 달빛의 여왕이 지나가고 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